우리 국민의 절반 이상은 ‘장기적 울분 상태’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국민 10명 중 7명은 세상이 공정하지 않다고 답했는데, 공정에 대한 믿음이 낮을수록 울분도가 높게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건강재난 통합대응을 위한 교육연구단은 설문조사 업체인 케이스탯리서치를 통해 지난달 15~21일 전국 만 18세 이상 성인 1500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 증진 관련 조사를 진행해 이 같은 결과를 도출해냈다고 7일 밝혔다.
조사 결과,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전반적인 정신건강 수준을 묻는 항목에 응답자의 48.1%는 ‘좋지 않다’고 답했다. 이어 ‘보통’이 40.5%, ‘좋다’가 11.4%로 집계됐다. 5점 척도로 따지면 평균 점수는 2.59점으로 ‘보통’인 3점에 미치지 못했다.
정신건강 수준이 ‘좋지 않다’고 답한 이들은 원인으로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37.0%)를 가장 많이 꼽았다. 두 번째로 높은 답변도 이와 비슷한 ‘타인·집단의 시선과 판단이 기준이 되는 사회 분위기’(22.3%)였다.
연구진이 자가측정 도구로 주요 감정과 정서 상태를 5점 척도로 측정한 결과, 응답자들의 12.8%는 ‘높은 수준의 심각한 울분’(2.5점 이상)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54.9%는 울분의 고통이 지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1.6점 이상)였다.
심한 울분 비율은 30대에서는 17.4%였지만 60세 이상에서는 9.5%였다. 월 소득 200만 원 미만 집단에선 21.1%, 월 소득 1000만 원 이상 집단에서는 5.4%였다. 자신의 계층을 ‘하층’으로 인식하는 집단의 심한 울분 비율은 16.5%로 가장 높았지만 ‘상층’ 집단에서도 15.0%가 나왔다. ‘중간층’은 9.2%로 비교적 낮았다.
한국의 정치사회 사안별로 울분의 정도를 측정한 결과 ‘입법·사법·행정부의 비리나 잘못 은폐’로 울분을 느꼈다는 비율이 85.5%로 가장 높았고 이어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85.2%) ‘안전관리 부실로 초래된 의료·환경·사회 참사’(85.1%) 등이었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문항에 동의하지 않은 응답자 비율은 69.5%였다. 다만 응답자 개인 차원의 공정성을 묻자 ‘나는 대체로 공정하게 대우 받는다’고 답한 비율은 58.0%로 더 높았다. 연구진은 울분 수준은 공정에 대한 신념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봤다. 공정성 신념이 높아질수록 울분 점수가 낮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응답자의 47.1%는 지난 1년 동안 건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40대(55.4%)와 30대(51.7%), 월 소득 200만원 미만(53.8%)이 이러한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스트레스를 주로 유발한 건 건강 변화(개인·가족 수준), 사회적 관계 변화(사회 수준), 정치 환경 변화(환경 수준)였다.
또 응답자의 27.3%는 지난 1년 중 기존에 하던 역할이나 책임을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큰 정신건강 위기가 왔었다고 답했으며, 이들 중 51.3%는 자살을 생각, 그중 13.0%는 실제로 시도했다고 응답했다.
조사 대상 1500명 전체에게 ‘스트레스 경험 시 대처 방법’을 복수로 고르도록 했더니 ‘가족이나 친구에게 털어놓고 도움을 구한다’가 39.2%로 가장 높았다. 그러나 ‘혼자 참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가 38.1%로, 두 번째로 높았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답한 비율은 15.2%에 불과했다.
이번 조사를 총괄한 유명순 교수는 울분과 공정성 관계 등에 대해 “사회 안전·안정성을 높게 유지하고, (사회적)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이 개인과 집단의 정신건강을 위하는 길”이라며 “앞으로 의료적 노력은 물론 사회적 차원에서 정신건강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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