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규동 감독이 파격적인 액션 장르로 돌아왔다. 그의 신작 ‘파과’는 60대 여성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례적인 작품으로, 구경모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주인공 ‘조각’ 역은 베테랑 배우 이혜영이 맡았으며, 영화는 올해 초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프리미어 상영된 후 “노년의 고독을 액션으로 표현한 수작”, “강렬한 액션과 감성의 절묘한 조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북미 개봉 제목은 ‘The Old Woman with the Knife’이다.
파과는 은퇴를 앞둔 킬러 ‘조각’과 그녀를 평생 쫓아온 젊은 킬러 ‘투우’의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이들의 인연은 단순하지 않다. 조각은 25년 전 투우의 아버지를 제거한 인물이지만, 투우에게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끼게 해준 인물로 기억된다. 이 아이러니한 서사는 단순한 복수극을 넘어 기억과 용서, 폭력의 순환이라는 주제로 확장된다.
민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기존 한국 영화에서 보기 드문 노년 여성 액션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아시아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노년 여성의 강인함과 취약함이 공존하는 캐릭터이다. 그는 “처음 원작 소설을 읽고 조각이라는 인물의 강렬함에 압도당했다. 노년의 여성 킬러라는 설정 자체가 신선했고, 무엇보다 ‘쓸모’라는 주제를 통해 나이 들어가는 이들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밝혔다. 또한 “이런 캐릭터를 스크린에서 보는 기회는 매우 드물다. 특히 여성 관객들에게 새로운 공감과 자극을 줄 수 있는 히로인이 필요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조각을 연기한 이혜영은 데뷔 이후 첫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민 감독은 “이혜영 배우의 카리스마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녀는 3개월간의 액션 훈련을 헌신적으로 소화했고, 감정과 액션의 균형을 완벽하게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특히, 영화 속 조각과 투우는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볼 수 없는 복잡한 관계다. 25년 전 조작이 투우의 아버지를 죽였지만, 역설적으로 그는 그녀를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첫 번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민규동 감독은 이 역설적인 관계를 통해 ‘용서’와 ‘기억’의 문제, 그리고 폭력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 ‘파과’는 오프닝이 다소 진부하고 잔인한 묘사가 눈을 감게 만든다. 하지만 액션만큼은 기대해도 좋다. 민규동 감독은 액션 연출에 있어서도 뚜렷한 철학을 세웠다. 첫째, 액션은 절대 가짜처럼 보이면 안 된다. 둘째, 캐릭터의 성격과 경험이 액션에 반영돼야 한다. 셋째, 스타일리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조각과 투우의 액션 스타일을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조각의 움직임은 오랜 경험과 절제를 담아 효율적이고 치명적인 반면, 투우는 젊음의 에너지와 충동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칠고 과시적인 스타일이다. 민 감독은 이를 “물과 불의 충돌”이라고 표현하며, 두 인물의 삶과 내면이 고스란히 반영된 액션을 통해 감정의 흐름까지 포착하고자 했다.
카메라는 배우들의 숨결과 움직임을 따라가도록 설계됐으며, 격렬한 액션 속에서도 인물의 표정을 클로즈업으로 담아내 감정의 밀도를 높였다. 특히 투우의 전투 장면은 롱테이크로 촬영되어 현장의 긴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후반부 놀이공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광기의 액션 시퀀스는 “한국판 존 윅”이라 불릴 만큼 폭발적인 에너지를 자랑한다.
‘파과’는 단순한 액션 영화가 아니다. 나이 들어가는 삶에 대한 고찰, 사회에서의 존재 가치에 대한 질문, 그리고 인간관계의 복잡성을 정교한 연출과 깊이 있는 서사로 풀어낸다. 민 감독은 “나이가 들수록 사회로부터 ‘쓸모없음’이라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그 두려움이 어떻게 존재 자체를 흔드는지를 다룬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베를린에 이어 브뤼셀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도 공식 초청된 민규동 감독의 영화 ‘파과’는 한국 개봉 후 오는 5월16일 북미 극장에서도 상영될 예정이다.
/하은선 골든글로브 재단(GGF)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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