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갈등을 앓고 있는 시기에 선출된 레오 14세는 첫 미국 출신 교황이지만 미국인 답지 않은 교황으로 평가받는다. 오랜 기간 페루 빈민가에서 사목하며 헌신해왔으며 페루 시민권을 획득한 페루 대주교 출신이라는 점에서 두 번째 남미 출신 교황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지난 8일(현지시간) 133명으로 구성된 추기경 선거인단은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 시작 이틀째, 네 번째 투표에서 미국 출신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69) 추기경을 가톨릭 제267대 수장으로 추대했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은 '레오 14세'라는 즉위명을 택했다.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며, 강인한 리더십과 용기를 상징한다.
교황청 대변인 마테오 브루니는 19세기 후반 노동자 권리와 사회 정의를 옹호했던 레오 13세 교황(재위 1878-1903)의 유산을 이어받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레오 13세는 획기적인 회칙 '레룸 노바룸'을 통해 공정한 임금과 인간적인 노동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사유재산을 인정하되 공동선을 위한 책임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브루니 대변인은 "동시에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 노동과 삶의 방식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나타내는 명확한 메시지"라고 덧붙였다.
1955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난 레오 14세는 1982년 사제 서품을 받고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으로 활동해 왔다. 이 수도회에서 교황이 배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미국 국적이면서도 20년간 페루 빈민가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2015년에는 페루 시민권을 획득하고 같은 해 페루 대주교로 임명됐다. 선진국 출신임에도 소외된 지역에서 오랜 기간 봉사한 그의 행보가 다수 추기경들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 영국 텔레그래프지가 바티칸 소식통을 인용해 레오 14세를 "가장 미국적이지 않은 미국인"이라고 보도하기로 했다.
전임자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기조를 계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레오 14세는 2023년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교황청의 핵심 부서인 주교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주교부는 각국 주교 임명을 관할하는 중요 기관으로, 교황청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조직 중 하나로 꼽힌다. 외신들은 그가 주교 선발 과정에 여성 3명을 최초로 참여시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개혁 조치를 실행에 옮긴 인물이라고 전했다.
다만, 신학적으로는 중도적 입장을 견지해 왔으며 교회 내 개혁 성향과 보수 성향 사이에서 조화를 이루는 역할을 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례로 레오 14세는 선출 직후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나치게 화려하다며 착용하지 않았던 진홍색 모제타(어깨 망토)를 입고 대중 앞에 등장했다. 이를 일정 부분 전통으로의 회귀를 시사하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다. 레오 14세가 이끌었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미셸 팔콘 신부는 NYT에 "품위 있는 중도파"라며 "무엇이든 과하지 않다"고 말했다.
레오 14세는 9일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서 추기경들과 함께 미사를 집전하고, 11일에는 성 베드로 대성전 발코니에서 첫 축복 메시지를 발표할 예정이다. 12일에는 세계 언론인들과의 첫 공식 만남을 가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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