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이 당초 계획보다 스테이블코인 발행 인가 요건을 대폭 완화하기로 한 것은 발행 문턱이 과도하게 높을 경우 스테이블코인 관련 산업 육성이 더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미국·일본·싱가포르 등 주요국들이 앞다퉈 스테이블코인 패권 경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다양한 분야의 스타트업들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게 정부·여당의 판단이다.
9일 가상자산 업계와 정치권에 따르면 올 4월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디지털자산기본법 초안을 공개한 뒤 업계·학계와 진행한 세 차례의 법안 리뷰에서는 이 같은 의견이 쏟아졌다.
과도하게 엄격한 발행 요건이 다양한 아이디어와 높은 기술력을 가진 핀테크·가상자산 업계 스타트업들의 진입을 막는다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가상자산 업계의 한 관계자는 “50억 원 이상으로 진입 문턱을 설정할 경우 자본력이 충분한 은행이나 대기업 위주로 발행 사업이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며 “스타트업의 진입이 어려워져 산업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방해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현금과 신용카드 등을 대체할 새로운 지급결제 수단으로까지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진입 요건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지난달 대선 토론 당시 “지급준비금 50억 원이면 누구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수 있다”며 “시장 혼란과 사기 피해가 속출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이런 우려를 고려해 재무 안전성을 강화하는 내용도 법안에 추가하기로 했다. 추후 발행사가 파산하더라도 이용자가 보유한 스테이블코인을 환불받을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대표적이다. 기업 도산 시에도 고객 자산이 보호될 수 있도록 분리해두는 ‘도산 절연’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다른 스테이블코인과 같이 원화와 1대1로 준비금을 마련해두도록 하고 보안을 위한 각종 물적·인적 장치까지 갖추도록 해 이용자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방침이다. 조재우 한성대 블록체인연구소 교수는 “50억 원이 요건이 될 경우 뛰어난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더라도 30억~40억 원의 자본금밖에 없다면 사업에 뛰어들 수 없다”며 “인가 요건을 낮추더라도 보안 인력이나 시스템 구축을 하는 데도 상당한 비용이 들어가므로 일정 규모 이상의 기업이 진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초안에는 디지털자산 산업 육성과 진흥 업무 심의 의결 기구로 대통령 직속 디지털자산위원회를 설치하고 금융위원장과 민간위원장 2명이 공동 위원장을 맡기로 했으나 최종 법안에는 민간위원장 1명만 위원장으로 두게끔 한 것으로 전해졌다. 위원회 구성도 20명에서 30명으로 확대한다. 민간의 목소리를 더 반영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가상자산 상장 시 거래소가 필요할 경우 심사를 맡길 수 있는 거래지원적격성평가위원회를 자율 규제 기구인 한국디지털자산업협회(가칭) 아래 설치한다.
업계에서는 이번 법안 통과로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속도가 붙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온다. 이재명 대통령의 경제·금융정책을 보좌하게 된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도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의 필요성을 강조해왔다. 블록체인 분석 플랫폼 아르테미스에 따르면 전 세계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장은 올 들어 2월까지 누적 결제 규모가 100억 달러(약 13조 8380억 원)를 돌파하면서 전년 동기 대비 80% 폭증했다. 윤민섭 디지털소비자연구원 박사는 “민간 주도에 방점을 둔 법안이 마련됨에 따라 핀테크·가상자산 스타트업이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에 참여해 관련 생태계가 빠르게 활성화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