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은행이 자사 공공배달 애플리케이션 ‘땡겨요’에 원화 스테이블코인 결제를 도입하기 위한 기술검증(PoC) 작업에 착수했다. 국내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을 규율하기 위한 법이 아직 제정되지 않았지만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우선 발행이 거론되고 있는 만큼 관련 제도만 갖춰지면 곧바로 사업에 뛰어들기 위한 포석이다. 미국이 ‘지니어스법(Genius Act)’을 통과시키면서 코인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는 상황에서 시장 선점을 위한 경쟁이 한층 뜨거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23일 금융계에 따르면 최근 신한은행은 스테이블코인 기반 지급결제에 대한 PoC를 추진하기로 했다.
PoC는 본격적인 서비스 도입에 앞서 기술이나 사업 모델의 실현 가능성을 실험·검토하는 절차다. 새 기술을 적용하기 전에 효과와 안정성을 따져보는 사전 단계의 성격이다.
신한은행은 발행의 근거가 확보되면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찍고 이를 자사 배달 앱인 땡겨요 결제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땡겨요는 가입자가 550만 명을 넘어설 정도로 사용자 기반이 탄탄하다. 은행 내부에서는 지방자치단체와의 협약을 통해 제공 중인 지역화폐 결제 서비스를 효율화하는 데 스테이블코인의 활용 가치가 높다고 보고 있다.
KB국민은행을 비롯한 다른 시중은행들도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위한 PoC를 검토 중이다. 은행권 공동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추진 중인 오픈블록체인·DID협회(OBDIA) 역시 세부 사업 방안 수립 작업에 착수했다.
은행권과 핀테크 업계가 스테이블코인 사업 구체화에 나선 것은 세계 주요국 흐름과 맞물려 국내에서도 제도권 편입 논의가 속도를 낼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미국은 최근 지니어스법 통과로 스테이블코인 산업 주도권을 더욱 강화하고 있고 일본과 유럽연합(EU) 등은 이보다 앞서 규제 체계를 마련했다. 이에 발맞춰 국내에서도 민병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디지털자산기본법을 발의했다. 같은 당 강준현 의원도 디지털자산혁신법을 준비하는 등 입법화 움직임이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 내에서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컨소시엄 형태로 시장 진입을 허용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신한은행이 발 빠르게 기술검증(PoC)에 착수한 것도 이 같은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선제 대응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도입에 대한 시장 기대감이 큰 만큼 제도 시행 시 곧바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차원이다. 신한은행은 올해 안에 상용화 가능한 수준의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에 앞서 신한금융지주는 지난달 말 ‘KRWSHB’ ‘SFGKRW’ ‘SKRW’ ‘KRWSFG’ ‘SKRW’ ‘SHBKRW’ 등 21건의 스테이블코인 관련 상표를 출원한 바 있다.
신한은행이 배달 앱 ‘땡겨요’에 스테이블코인 기반 결제를 도입하려는 것은 지급결제 수단 중 하나로 쓰이는 지역화폐의 시스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차원이 크다. 2022년 1월 공식 출시된 땡겨요는 낮은 수수료와 빠른 정산 등 소상공인과의 상생을 앞세워 빠른 속도로 이용자 기반을 넓혀가고 있다. 이달 21일 기준 회원 수는 550만 명을 넘어섰다. 특히 서울시를 비롯한 36개 지방자치단체와 손을 잡고 지역화폐 결제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도 추진 중이다. 신한은행의 한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을 활용해 지역화폐를 특정 사용처에서 결제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래머블 머니’를 구현한다면 정책 효과가 극대화할 것”이라며 “땡겨요를 시작으로 국내의 다양한 유통·사용처로 확장 가능한 구조로 설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점차 확대되고 있는 디지털 자산 시장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의지로도 읽힌다. 앞서 신한은행은 한국은행의 중앙은행디지털화폐(CBDC) 실증 사업인 ‘프로젝트 한강’에도 적극 참여해 디지털 자산 기반의 결제를 실험한 바 있다. 당시에도 땡겨요가 CBDC 가맹점으로 참여했으며 신한은행에서 CBDC를 쓴 이들의 80% 이상은 땡겨요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신한은행이 CBDC뿐 아니라 스테이블코인 사업에도 적극 나서 디지털 자산 사업에서 주도권을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른 시중은행들도 스테이블코인 사업 준비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정부 정책에 발맞춰 다양한 파트너사들과의 PoC를 구상하고 논의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하나은행 관계자 역시 “스테이블코인은 향후 국가 간 지급결제, 해외 송금 등 금융 서비스의 새로운 수단으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며 “원화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위해 제도적·사업적 검토 및 사업 참여에 따른 필수 인프라 등을 분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NH농협은행 역시 PoC를 실무적으로 검토하는 단계라고 전했다.
은행권의 공동 발행 사업도 구체화하는 모습이다. 주요 시중은행들과 금융결제원 등이 참여하는 오픈블록체인DID협회(OBDIA)는 은행권 스테이블코인 공동 사업 추진을 위한 로드맵 수립에 착수했다. 각 은행의 자체 사업과 별개로 은행권이 공동으로 추진할 수 있는 사업을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정보기술(IT) 기업 NHN이 스테이블코인 정산 사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NHN KCP와 NHN페이코는 블록체인 업체와 스테이블코인 관련 논의를 벌이고 있다. NHN 측은 스테이블코인 발행을 넘어 발행 주체가 서로 다른 여러 스테이블코인을 중간에서 정산해주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존 카드 결제망에서 가맹점과 카드사 사이를 연결하는 부가가치통신망(VAN)사처럼 스테이블코인 정산을 위한 허브가 되겠다는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NHN과 수호아이오는 컨소시엄 구성을 논의하고 있다. 해당 사업은 가칭 ‘프로젝트 남산’이다.
예를 들어 네이버와 카카오·신한에서 발행한 스테이블코인을 A가맹점이 국민은행에서 원화로 바꾸려고 하면 해당 발행사들이 국민은행과 제휴를 맺어야 교환이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이 발행되는 블록체인도 각기 달라 정산 과정은 더 복잡하다.
정산 허브를 구축하면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게 NHN의 구상이다. 가맹점과 발행사·금융기관 사이를 중개해 실시간 잔액 조회와 정산 처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르면 9월부터 국내를 방문한 외국인을 대상으로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 테더(USDT)와 유에스디코인(USDC) 정산 실험을 시작할 예정이다. 한국조폐공사도 해당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NHN KCP 관계자는 “해당 사업을 최종 확정한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스테이블코인이 결제·정산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판단하고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고 전했다.
원화 코인 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앱 개발도 진행되고 있다. 블록체인 기술 기업 블록오디세이는 자동 매매 기능으로 코인 거래가 가능한 탈중앙화 앱을 준비 중이다. 연창학 블록오디세이 창업자는 “발행사 입장에서는 결제 외에 원화 코인 수요처가 필요할 것”이라면서 “트레이딩 슈퍼앱으로 이를 공략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를 앞두고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비즈니스 모델 논의와 관련 생태계 구축에 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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