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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하루] 매카트니의 중국 방문과 고두 의례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외교에서 의례는 핵심적인 사안이다. 현재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욱 그러했다. 의례는 형식적인 사안이 결코 아니었다. 1793년 영국 왕의 국서와 예물을 가지고 청나라의 중국에 방문한 특사 조지 매카트니가 맞닥뜨린 문제 역시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 충성의 절)의 의례였다. 물론 영국의 속셈은 자유무역에 대한 요구였지만 겉으로는 건륭제의 생일 축하를 한다는 명목으로 방문했다.

1793년 9월 14일 아침 매카트니는 마침내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청의 황제 건륭제와 대면했다. 과연 매카트니는 요구에 응하여 삼궤구고두를 행했을까. 매카트니와 청 측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 매카트니는 왕에 대한 존경의 의례로 한쪽 무릎만 꿇고 경례를 했다고 기록했지만 청에서는 삼궤구고두를 한 것처럼 기록했다. 진실은 그 중간쯤의 어정쩡한 자세가 아니었을까. 당시 피서산장에는 황제의 탄신을 맞아 타국의 사신들과 관료·악단·하인까지 수백 명이 운집해 삼궤구고두의 절을 반복했다. 이 성대한 의전에서 매카트니만 홀로 한 발만 꿇는 자세로 도도하게 머리를 쳐들고 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느 정도 의례를 따르는 척이라도 했기에 건륭제와의 만남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후 제대로 된 회담이나 성과는 없었고 청의 통치자 건륭제는 매카트니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청의 정치 체계의 근간이 이미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간파한 매카트니는 이렇게 일기에 기록했다. “중국은 일급 전함이지만 아주 오래되고 금방이라도 좌초할 것 같은 상태의 전함이다.”



그로부터 49년 뒤인 1842년 아편전쟁의 결과인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매카트니의 일기는 ‘예언’처럼 실현됐다. 매카트니는 건륭제 앞에서 굴욕적인 의례에 약간의 타협을 했지만 청의 내부 정보를 캐냈고 이를 통해 훗날 힘의 복수가 가능한 지적 토대를 쌓았다. 매카트니보다 157년 전인 1636년 청의 황제 즉위식에서 삼궤구고두의 의례를 꼿꼿하게 거부했으나 이를 빌미로 병자호란의 고초를 겪었던 조선의 사례가 떠올라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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