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다시 성장하게(Make Korea Grow Again).”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23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가 인구 충격을 딛고 연 2%씩 2050년까지 성장하려면 지금보다 더 많이 일하거나 생산성 증가율을 더 높여야 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성장을 위한 유일한 선택지는 혁신에 의한 생산성 향상뿐”이라고 주장한 박 전 장관은 노동시장의 유연성과 투명성 제고를 최우선 개혁 과제로 꼽았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개혁에 동참하도록 노동계 등 핵심 지지층을 적극 설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고용노동부 장관과 기재부 장관을 지냈고 현재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이 대통령이 취임 후 주요 기업 총수 등을 만나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정리하겠다’고 약속한 것을 높게 평가했다. 반면 보편적 지원으로 가닥이 잡힌 2차 추가경정예산에 대해서는 도덕적 해이 유발 등의 부작용을 우려했다.
-이재명 정부가 경제·안보 복합위기 속에서 출범했다. 새 정부와 이 대통령의 가장 주요한 책무와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한국을 다시 성장하게’라는 구호로 새 정부의 책무를 요약할 수 있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앞세우고 있다면 이 대통령은 모든 정책의 초점을 성장에 맞춰야 할 상황이다. 잠재성장률 하락을 반전시키려면 구조 개혁을 통한 생산성 향상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올해 맥킨지글로벌연구소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가 인구 충격을 딛고 연 2%씩 2050년까지 성장하려면 주6.4시간씩 더 일하거나 1.5%에 불과한 생산성 증가율을 3.3%로 높여야 한다. 유일한 선택지는 혁신에 의한 생산성 향상뿐이다. 글로벌 상장사 중 2% 남짓한 혁신 기업들이 매출액과 이자·세금 차감 전 영업이익(EBIT), 시가총액의 과반을 차지한다. 미국·독일·영국의 경우 2%가량의 유력(standout) 기업이 해당 국가 생산성 향상의 63%만큼 기여한다는 통계도 있다. 이 대통령은 압도적인 여대야소(與大野小)라는 국정 수행에 유리한 여건을 확보한 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주기 바란다. 당장은 힘들어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조금씩 양보하는 개혁에 동참하도록 국민들을 설득해야 한다. 특히 노동계를 비롯한 핵심 지지층을 설득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대통령의 대선 첫 번째 공약인 ‘세계를 선도하는 경제 강국’을 실현하기 위해 우선 실천해야 할 과제는.
△모든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할 때 경제 성장을 중심에 둬야 한다. 성장하려면 기여와 보상이 부합할 수 있도록 공정하고 역동적인 제도와 규범을 확립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제주체의 유인과 책무를 강화하고 노력과 창의를 촉진할 수 있다. 특히 돈이 들지 않는 규제 개혁, 예를 들면 이익집단의 기득권 축소와 보모(保姆) 국가에서의 탈피, 노동시장 유연성 및 투명성 제고 등을 최우선 개혁 과제로 삼아야 한다.
-성장의 걸림돌로 꼽히는 저출산 문제의 해결책은 무엇인가.
△경제적 유인도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가족은 공동체의 비녀장이자 자아 실현의 전제’라는 인식을 고양하는 교육·캠페인을 전개해야 한다. 비녀장이 수레바퀴의 이탈을 막아주듯이 가족은 공동체를 지속 가능하게 하며, 근로 의욕과 저축 동기, 책임·자조 의식의 원천이라는 점을 부각해야 한다. 아울러 가부장제 등 낡은 문화·관습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예컨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인 남성의 가사·육아 분담률부터 높여야 한다. 그동안 금기시돼 OECD 최하위 수준인 원격근무를 육아기 부모에게 장려해 출퇴근 부담을 줄이고 근무시간을 유연하게 선택하도록 허용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만하다.
-이 대통령이 취임하고 20일이 흘렀다. 가장 긍정적인 부분과 아쉬운 부분은.
△주요 기업 총수들과 경제단체장들을 만나 “불필요한 규제를 과감히 정리하겠다”고 약속한 점을 가장 긍정적인 모습으로 꼽고 싶다. 아쉬운 점을 말하기에는 아직은 다소 이른 감이 있다.
-기업들이 바라는 규제 혁파는 뭔가.
△정책의 틀을 ‘낮은 길’에서 ‘높은 길’로 전환해야 한다. 다시 말해 획일적이고 지나친 규제와 무차별 지원의 후진적인 프레임에서 시장 친화적 규제와 선별·맞춤 지원 중심의 선진적인 프레임으로 탈바꿈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표준과 동떨어져 기업 활동을 옥죄는 획일적 과잉 규제가 문제다. 천편일률적인 기준을 정해두고 기업의 팔다리를 마구 잘라내는 식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규제를 혁파해 성장 사다리를 복원해야 한다.
-당장 시급한 규제 개혁 과제를 꼽는다면.
△금융·관광·의료·법률 등 고부가가치 서비스 산업의 문턱을 낮추고 울타리를 허물어 혁신을 앞당기고 신산업의 태동을 촉발해야 한다. 대중 인기에 영합하는 가격 통제도 남발해서는 안 된다. 대형마트 의무 휴업처럼 명분만 앞세운 탁상공론과 대증·날림 요법으로 생겨난 시대착오적 규제는 과감하게 철폐해야 한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덩달아 올라가는 연공급(호봉제) 비중도 대폭 줄이고 성과나 직무의 가치에 따라 임금을 결정하는 비중을 높여야 한다. 대만·일본 등 경쟁국에 비해 훨씬 높아진 인건비도 이제는 합리화할 때가 됐다.
-미국·중국 등은 국가 차원에서 자국 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는 데 비해 우리는 기업 지원에 소극적이지 않나.
△금융·세제 등 기업에 대한 직접 지원도 중요하지만 앞서 거론했듯이 과감한 규제 혁파와 함께 기업의 활동 기반을 강화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이를테면 기업들이 미래 기술을 선점할 수 있도록 인공지능(AI),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차세대 이동통신, 융복합 소재 등 신산업을 이끌 핵심 인재 양성에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해외의 우수 인재들을 적극 유치하고 우리의 핵심 인재들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유출 예방 대책을 강화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래 기술 선점을 위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정원 책정과 예산 집행 등에 대한 대학의 자율성을 높여야 해외의 과학기술 석학들을 우리 대학으로 영입할 수 있다. 그래야 국내에서 차세대 핵심 인재 육성도 가능해진다. 또 산학연 네트워크를 대폭 강화해 공유·개방·융합이 촉진되는 혁신 생태계가 산업계에 튼튼히 뿌리내릴 수 있게 해야 한다. 반도체·원전·방산·조선 등 전략 제조업과 소재·부품·장비의 원천·핵심 기술 연구개발(R&D)을 내실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기업의 미래 기술 선점 노력이 지속 가능하도록 가업 상속 부담도 완화해야 한다. 상속 평가액의 20%를 가산하는 최대주주 할증 평가제는 논거도 없는 징벌 세제인 만큼 폐지하는 게 맞다.
-미국의 관세 압박과 환율 절상 요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중국이나 영국 등의 선례를 참고해 일방적 양보나 100% 방어보다는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협상에 무게를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따라서 미국과 ‘협력·상생할 영역’을 치밀하게 발굴해 절충 여지를 확보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 기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다자 무역의 국제 규범을 활용해 협상력을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농업·서비스 부문 등의 비관세장벽은 낮춰서 국내 산업 체질을 개선하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환율은 시장 원리에 따라 결정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외환시장 개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환율 급변동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데 힘써야 한다.
-국방비와 방위비 분담금 증액 압박 등 안보 문제도 관세 협상과 맞물려 있는데.
△한미 무역 협상은 경제 협상을 넘어 외교·안보와 얽힌 복합 협상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조선과 방산은 ‘안보와 산업의 교차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협상의 돌파구 또는 레버리지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 미국은 조선 능력 보완과 비용 절감이 시급한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한미 조선 협력은 한국으로서는 동맹국인 미국의 산업을 지원한다는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수주 확보, 시장 확대, 산업 고도화를 동시에 꾀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이런 식의 한미 간 상생 협력이 이뤄지면 미국의 방위비 압박을 완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미국이 조선 협력과 방위비를 별개 사안으로 취급하거나 기술이전 또는 미국 내 일자리 축소 우려 등이 협상의 걸림돌이 될 수도 있으므로 낙관은 금물이다.
-2차 추경이 보편적 선별 지원으로 가닥이 잡힌 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경기 부양을 위한 추경은 필요하지만 재정 여력이 한정된 만큼 2차 추경은 생산적인 용도로 한정하고 꼭 필요한 최소한 규모로 자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전 국민에게 최소 15만 원, 최대 50만 원씩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는 보편적 지원 결정에 지역화폐 지급까지 반영된 점이 특히 우려된다. 무차별적인 전방위 지원은 효율이 낮을 뿐 아니라 도덕적 해이를 유발하는 등 부작용이 되레 클 수 있다.
◆He is…
1955년 마산에서 태어나 부산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행정고시 23회로 공직에 발을 들여 재무부 사무관 등으로 일했다. 이후 하버드대 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성균관대에서 행정학을 가르쳤고, 17대 국회에 한나라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입성했다. 이명박 정부 때는 청와대 정무수석·국정기획수석, 고용노동부 장관, 기획재정부 장관을 지냈다. 지금은 성균관대 이사장과 경제교육단체협의회 회장,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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