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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론직설] “기술 경쟁은 시간 싸움, R&D에선 주52시간제 폐지·완화를”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

처벌 우려에 R&D 속도 못 내, 이대론 반도체 역전 당해

‘AI 3대 강국’ 실현, 기초과학·원천기술 뒷받침돼야 가능

미래 선도국 되려면 인재 우대하고 정책 예측 가능해야

석학 퇴직 땐 연구소 문 닫고 中 이탈…정년 연장 절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가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확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주52시간 근무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미중 갈등과 지정학적 리스크 등으로 인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이 분초를 다투는 국가 대항전으로 펼쳐지고 있다. 승자 독식 구조인 기술 경쟁 시대에는 한번 뒤처지면 경제와 산업은 물론 안보마저 위협받게 된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인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는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신약 분야 등의 첨단 기술 확보 경쟁은 시간과의 싸움”이라며 “최소한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주52시간 근무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속도전에서 밀릴 경우 반도체 산업마저 중국 등에 역전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재명 대통령의 1호 공약인 ‘인공지능(AI) 3대 강국’ 실현도 다른 R&D 분야와 산업이 동반 성장할 때만 가능하다”며 “기초 과학과 원천 기술이 발전해야 바이오·반도체·배터리 등 전략 산업에서 세상에 없는 신기술을 만들 수 있다”고 조언했다. 현 교수는 최근 다른 석학들과 함께 최종현학술원이 발간한 ‘기술 패권 시대, 흔들리지 않는 과학기술 국가 전략’ 보고서 집필에 참여했다.

-기술 패권 경쟁에서 한국이 밀리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이 일관된 국가 전략을 바탕으로 기초 과학부터 첨단 기술까지 세계 최고 수준에 올라와 있다. 양자 컴퓨팅, 우주 기술 등 미래 산업에서 중국은 미국과 함께 그냥 ‘빅2’다. 우리나라가 확실하게 우위에 있는 분야는 반도체 중에서도 고대역폭메모리(HBM), 하이엔드(고사양) D램밖에 없다. 범용 D램은 이미 중국에 추월당했다.

-과학기술 연구자로서 새 정부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과거 SK하이닉스 연구원들이 밤새 연구하지 않았다면 HBM 주도권은 미국 마이크론에 넘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주52시간제를 지키지 않을 경우 기업 최고경영자(CEO)가 법적 처벌을 받는다. 이대로는 반도체 경쟁력도 ‘제로(0)’가 될 것이다. 대신 연구원들이 일한 만큼 연봉·성과급 등을 통해 철저히 보상해주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한국을 존중하는 것도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등 우리 기업들이 첨단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주52시간제가 과학기술 발전에 어느 정도로 걸림돌로 작용하는가.

△제가 참여하고 있는 신약 개발 연구를 사례로 들어 보자. 우리 몸속에 들어가는 치료제 개발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 화학물 합성, 세포 실험, 임상 실험 등의 과정을 거친다. 동물 실험만 해도 일반적으로 생쥐에서 시작해 개나 돼지·원숭이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첫 단계인 세포 실험을 예로 들면 우리 연구원들은 한시가 급해도 퇴근 시간이 되면 6개월 동안 기른 특수 세포를 놓아두고 집에 가야 하는 실정이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가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확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주52시간 근무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새 정부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 등 요직에 기업 출신 과학기술인을 발탁했는데.

△과학기술에 AI만 있는 게 아닌데 정보기술(IT) 분야에 편중돼 있다는 점이 우려된다. 과학기술 강국들의 공통점은 기초가 탄탄하다는 점이다. 우리도 AI·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전략 산업이 발전하려면 수학·물리·화학·생물학 등 기초 과학과 원천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집중하려는 분야가 조금씩 달라진다.

△국가 중장기 R&D 전략을 기존의 ‘선택과 집중’에서 기초 역량과 다양성 확보를 중시하는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 과학 연구 중에서 곧바로 상업화·산업화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과학 연구는 테크놀로지의 출발점이다. 기초 과학이 약해지면 기술 주권의 토대를 마련할 수 없다. 정권 교체에도 흔들리지 않을 ‘과학기술 백년지계’ 아래 일관되고 예측 가능한 정책을 펴야 미래 기술 선도 국가가 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에서 R&D 예산이 대폭 삭감됐는데.

△신임 교수 정착비, 지방 대학들의 연구실 운영비 등이 사라지면서 기초 과학 연구 생태계가 엉망이 됐다. 젊은 과학자가 풀뿌리 연구로 출발해 성과를 내면 중견 연구, 국가 대형 연구 사업까지 단계별로 올라가는 사다리식 지원 시스템이 완전히 깨져 버렸다. 이제라도 기초 연구비를 대폭 확충하는 등의 방법으로 연구 환경의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아직 우리나라는 가장 중요한 기초 원천 기술이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아니라 대학에서 나오고 있다.

-전(前) 정부의 국제 연구 교류 활성화도 현실과 동떨어진 정책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국가 간 공동 연구는 정부 산업 정책이나 기술 유출, 특허권 문제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령 양자·우주 등 차세대 기술 분야에서 한국 정부가 기껏 10억 원 정도 지원한다고 미국이 연구 교류에 나서겠는가. 반대로 우리가 세계 최고의 과학기술을 갖고 있다면 해외에서 먼저 공동 연구를 하자고 매달리게 된다. 국내 연구 역량부터 탄탄히 갖춰야 국제 협력을 할 수 있고 우리나라를 세계의 인재와 자본이 몰려드는 혁신 허브로 만들 수 있다.

현택환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 석좌교수가 30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반도체 등 첨단 기술 확보 경쟁에서 낙오되지 않으려면 연구개발(R&D) 분야만이라도 주52시간 근무제를 폐지하거나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성형주 기자




-우리나라는 최상위 인재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심각하다.

△국내 대학에서 내국인 박사 취득자 수가 둔화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중국이 매년 5만 명에 가까운 박사를 배출하고 첨단 분야의 천재들을 어릴 때부터 조기 양성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예산 비중이 이스라엘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높고 연구 인프라도 세계적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를 활용할 인재가 부족하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국내에서 이공계 기피 현상이 나타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노력에 비해 사회적 보상이 낮기 때문이다. 학업 기간은 긴데 연구 환경과 대우는 경쟁국에 비해 좋지 않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 대학원생과 박사후연구원들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신진 연구원들의 일자리를 확충해야 한다. 또 세계적인 연구 성과나 기술이전 등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 요구된다.

-과학 인재들을 유치하고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진부터 시니어까지 생애 주기별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미국의 주요 대학들은 뛰어난 인재에게는 주거비 등 연구 정착금으로 100만 달러 정도를 지원한다. 국내 대학은 등록금 동결 등으로 인해 여력이 거의 없다. 유망한 젊은 교수들을 유치하려면 정부 차원에서 획기적인 지원책을 제시해야 한다. 신진 연구자들이 중국이나 미국 과학자들과 같은 출발점에 서지 못하고 연구비를 스스로 벌게 하면 글로벌 기술 경쟁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국내 이공계 석학들이 중국으로 속속 이탈하고 있는데.

△중국은 70세 정년 보장, 파격적인 연구비 등을 제안하면서 국내 석학들을 집요하게 영입하려 하고 있다. 정년 연장이 안 되면 과학기술계에 희망이 없다. 그동안 석학 한 명이 정년 퇴직하면 연구소 자체가 문을 닫는 경우를 많이 봤다. 중국 상하이나 베이징에 가 보면 국내 대표적인 전자 회사 출신의 엔지니어들이 중국 기업을 위해 부서 단위로 일하고 있다.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지만 애국심에 호소할 문제가 아니다. 기업에 있는 분들도 능력이 있다면 정년 후 국책연구소로 가거나 평생 연구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줘야 한다.

-중국의 ‘과학 굴기(崛起)’가 무서운 기세다.

△국제 학술지인 ‘네이처’의 경우 게재되는 논문의 절반가량은 중국 본토나 중국계 과학자가 책임 교신 저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다. 또 네이처지 국가별 혁신 순위에서 중국은 지난해 미국을 처음으로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IT 분야는 아직 인도계가 우세하지만 나머지 분야는 중국계가 없다면 미국 과학기술계마저 유지되기 힘든 상황이다.

-중국은 과학자를 대하는 사회적 풍토가 우리와 다른데.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매년 춘제(중국의 음력설)가 되면 원로 과학자들부터 찾아가 문안 인사를 한다. 과학기술이 없으면 중국의 미래도 없다는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중국은 과학기술을 군사·경제와 동등한 전략적 축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 주석부터 칭화대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우리나라 학술원이나 한림원 회원 격인 중국과학원 및 공정원의 원사로 뽑히면 공항 출입국 등에서 차관급 대우와 예우를 받고,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연구할 수 있다. 원사가 되면 자식 세대까지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또 중국 과학기술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중국은 철저한 적자생존의 자본주의 사회다.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자면 중국 AI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의 모교인 저장대에서 학장이 정교수 한 명을 불러놓고 대학에서 나가든지, 일반 직원으로 강등되든지 선택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고 하더라. 연구 실적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에서 교수 간 연봉 차이가 크다고 하지만 중국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중국의 젊은 과학자들은 정말 죽기 살기로 연구한다.

◆He is…

1964년 대구에서 태어나 덕원고와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이어 서울대에서 무기화학 석사 학위,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무기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공대 화학생물공학부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 석좌교수와 기초과학연구원(IBS) 단장을 맡고 있다. 서울경제신문이 주관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시작으로 포스코청암상, 삼성호암상,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한국공학한림원 대상 등 수차례 과학기술 관련 상들을 받았다. 국제 논문 피인용 수에 근거하면 한국인으로서 노벨상 수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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