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Polity)’ 프로젝트는 세계 각국의 정치 체제를 분석해 민주주의 수준을 수치화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각국의 정치 변화를 추적·반영해 민주주의 지표를 업데이트해온 폴리티 프로젝트는 올 1월 20일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1월 20일은 공교롭게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기 임기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민주주의 다양성(V-Dem)’ 프로젝트 역시 3월 30일 발표한 리포트에서 “현재 추세가 지속된다면 미국은 더 이상 민주주의 국가로 평가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 즈음 예일대 교수 세 명이 미국의 정치 상황과 학문의 자유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며 캐나다 이주를 결정했다. 그중 파시즘 연구로 정평이 난 제이슨 스탠리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미국은 이미 파시스트 체제로 진입했다고 단언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있나.
프랜시스 후쿠야마 같은 학자들은 250년 동안 유지해 온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제도와 전통은 여전히 자기 복원 능력이 있어서 미국의 민주주의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식 ‘삼권분립’은 행정·입법·사법부 사이의 엄격한 권한 분립이 아니라 분리된 세 기관이 일정 부분 서로의 권한을 공유하는 형태로 작동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에 많은 권한을 이양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행정 권한 남용을 제어할 수 있는 다양한 ‘견제와 균형’의 기제가 작동할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현재 의회는 트럼프가 장악한 공화당이 상·하원 모두 과반을 차지하면서 견제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사법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미국 연방 판사는 사임·사망·탄핵이 아닌 한 평생 임기가 보장되며 이는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사법부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한 장치다. 연방법원은 지금 트럼프를 상대로 견제와 균형의 역할을 나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연방법원은 트럼프가 ‘외국인 적법’을 근거로 추진한 몇 개의 이민 관련 행정명령에 제동을 걸었다. 또한 ‘국제 비상경제권법’을 활용해 단행한 광범위한 관세정책에 대해서도 위헌 소지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며 행정부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하버드대를 포함한 18개 대학은 학문적 자유와 헌법상 표현의 자유 침해를 이유로 행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6월 6일 트럼프 대통령은 로스앤젤레스(LA)에서 발생한 시위에 주 방위군과 해병대 투입을 명령했으나 연방지방법원은 이를 위헌적 조치라고 판결했다. 항소법원은 트럼프의 관세정책과 LA 군 투입에 대한 판결의 효력을 일시 정지시켰는데 이에 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은 미국에서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지를 가늠할 리트머스 테스트가 될 것이다.
미국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치르는 국가다. 따라서 대통령 국정에 대한 국민의 평가는 필연적으로 선거 결과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뉴스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임기 100일이 지날 때 트럼프 대통령의 지지율은 39%로 1945년 이후 미국 대통령들의 100일 지지율 조사에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미국 전역으로 확산하고 있는 ‘핸즈 오프(Hands Off)’와 ‘노킹스(No Kings)’ 시위도 심상치 않다. 트럼프의 권위주의적 통치 방식과 민주주의 규범 훼손에 대한 국민의 우려가 거리로 표출되고 있다.
2018년 출간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는 “민주주의가 선출된 지도자에 의해 내부로부터 무너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트럼프처럼 민주적 절차를 통해 집권한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헌법과 제도를 존중하지 않고 규범을 훼손하며 권력을 강화해 나간다면 민주주의는 외향만 유지한 채 내부로부터 붕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책의 저자들이 주장하듯 시민의 자발적 저항과 집단적 행동은 민주주의의 붕괴를 막는 최후의 보루가 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민주주의적 행보가 일견 성공하는 듯하지만 250년간 축적된 미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과소평가해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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