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고물가와 고금리라는 이중고가 서민경제를 다시 압박하고 있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현재 7년 이상 장기 연체 상태에 놓인 채무자는 약 113만 명에 이른다. 이들 중 상당수는 실직, 질병, 사업 실패 등 외부 충격으로 상환능력을 잃은 ‘비자발적 연체자’다. 장기 연체자 문제는 개인의 불운이 아니라 거시경제 환경 속에서 반복 발생하는 구조적 문제다. 따라서 그 해법 역시 개인의 자구노력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함께 감당하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봐야 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은 단순한 소득 부족이 아니라 역량(capability)의 결핍”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단순히 돈이 없는 상태보다 훨씬 깊은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장기 연체자는 금융서비스에서 배제될 뿐 아니라 주거·의료·교육·취업 등 다양한 영역에서 ‘제대로 살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상실한다. 이는 개인의 존엄성과 사회적 참여를 제한하는 상태이며, 사회 전체로는 생산 가능한 인적 자원의 낭비이기도 하다. 더욱이 연체자의 배제는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진다. 소비 위축, 고용시장 이탈 증가, 가족 해체, 정신건강 문제, 심지어 범죄 위험 증가까지 발생한다. 개인의 고통이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반대로 장기 연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고 재기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한 사람을 돕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회 전체의 선순환 구조를 회복시키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채무자 재기 프로그램’이 단순히 차주를 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소비 진작과 고용 안정, 지역경제 회복이라는 긍정적 결과로 이어졌다.
일각에서는 채무자의 부채를 줄여주는 것이 성실 상환자에 대한 불공정이 아니냐는 우려를 제기한다. ‘괜히 내가 열심히 갚았나’ 하는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우려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하지만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런 우려가 과도한 측면이 있다.
먼저 공정성 문제를 보자. 현행 채무조정 제도는 고소득자나 고액 채무자는 애초에 배제되기 때문에 무차별적 혜택이 아니다. 성실 상환자와 연체자를 구분하되 연체자 내에서도 회복 가능성과 필요성에 따라 세분화한 것이다. 도덕적 해이 우려도 현실과 맞지 않는다. 장기 연체자 대부분이 고의적인 불이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90일 이상 연체자의 70% 이상이 실직, 사업 실패, 질병 등 비자발적 요인으로 연체 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대체로 상환 의지는 있지만 상환 능력을 상실한 상태다. 또한 채무조정 과정 자체도 쉬운 탈출구가 아니다. 장기간 신용관리, 분할상환 의무 등 엄격한 사후관리가 따른다. 오히려 정상적인 대출보다 더 까다로운 조건이 부과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연체를 선택할 유인은 거의 없다.
연체 채무자들의 적극적 채무조정 제도 참여는 단순한 부채 탕감 요구가 아니라 회복을 위한 절실한 요청이다. 따라서 공적 채무조정의 확대는 단기적 형평성 논란을 넘어 장기적 시스템 안정성과 사회통합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방치된 고위험 채무는 금융시스템 전반의 부실 위험으로 확대될 수 있으며, 이는 결국 성실 상환자에게도 더 높은 금융비용으로 전가된다. 따라서 공적 채무조정은 채무자 개인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리스크를 줄이는 제도적 보험이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부채로 인한 불평등은 개인의 도덕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제도와 정책의 실패 때문일 수 있다"고 말했다. 공적 채무조정 제도의 확대는 바로 그 실패를 줄이고 사회적 복원력을 높이기 위한 시도다. 제도권 금융 이용이 어려운 이들이 고금리 대부업이나 불법사금융으로 내몰릴수록, 또 이들이 누적될수록 사회적 비용은 더욱 커진다. 따라서 적절한 시점에 채무조정을 통해 악순환을 끊고 정상화의 통로를 여는 것은 국가의 경제적 안정성과 사회 통합을 위한 전략적 투자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강한 고리’만으로 튼튼해지지 않는다. “사슬은 가장 약한 고리만큼만 강하다”는 말처럼, 취약한 고리를 복원할 때 비로소 전체 구조가 안정감을 얻는다. 장기 연체자 지원은 시혜나 동정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의 회복탄력성을 높이고 포용성과 지속가능성을 강화하는 전략적 투자다. 경제 회복과 사회 통합을 위해 지금 이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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