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 익숙한 어린 시절 놀이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생존을 건 냉혹한 게임으로 재해석된다. 분홍빛 거대 인형이 “무궁화 꽃이…”를 외치는 동안은 안전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며 “피었습니다”라는 외침과 함께 움직임이 감지되면 곧바로 총격이 가해진다. 손에 땀을 쥐는 이 게임은 결승선에 도달할 때까지 이 패턴을 반복한다. 동심의 세계가 무자비한 현실로 전복되는 이 장면은 단순한 놀이를 넘어, 규칙과 긴장, 멈춤의 미학을 내포한 은유적 서사로 작동한다.
어느 순간 에 멈추고 그 상황을 견디어내는 자만이 살아남는 세계. 어쩐지 요즘 현실과 닮아 있지 않은가. 오늘날 국제사회 역시 마치 ‘움직이지 않아야 살아남는’ 게임을 하고 있는 듯하다. 미국 벙커버스터 이란 폭격과 중동의 핵 위협, 일본의 난카이 대지진 전조증상를 비롯한 기후 위기, 경제 불안, 이민자 추방, 글로벌 동맹의 와해 등 복합적인 혼란 속에서 방향을 잃었다. 탈세계화와 다자주의의 약화는 공동체 감각을 붕괴시키고, 국제정치는 피로와 경직으로 가득해졌다. 세계는 정치적·경제적·환경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일상은 불안과 긴장의 연속이다. 현대인은 마치 만성적인 ‘소화불량’ 상태에 놓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런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몸이 불편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위장을 달래줄 무언가를 찾는다. 미국인이라면 분홍빛 소화제 펩토비스몰을 떠올릴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는 감정과 정신을 안정시켜줄 ‘문화적 소화제’가 절실하다. 흥미롭게도, 그 해답은 한국의 K드라마에서 발견된다. 단순한 스토리텔링을 넘어선 K콘텐츠는 오늘날 문화외교의 새로운 얼굴로 부상하고 있다.
지난 5월 부산 콘텐츠마켓과 칸 국제 페스티벌이 협력하여 칸시리즈 부산(CANNESERIES X BUSAN)을 개최하였다. 매년 프랑스 칸에서 열리는 이 행사는 이번에 부산 벡스코에서 그 상징적 장면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핑크카펫’이다. 전통적으로 붉은 카펫이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었다면, 핑크카펫은 친근함과 감성, 위로의 색이다. 이는 정서적 공감과 생명력, 치유의 미학을 품은 K드라마와 맞닿아 있다.
핑크는 단지 시각적 장식이 아니라, 감정의 불안과 트라우마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는 문화적 치유제다. 많은 이들이 핑크를 ‘귀엽고 여성적인 색’으로 여기지만, 그 이면은 훨씬 깊다. 핑크는 진지함을 전복하고, 권위를 해체하며, 때론 급진적 정치성을 띤다.
역사적으로 핑크는 남성을 상징하기도 했고, 나치 독일에서는 동성애자 탄압의 표식이었으며, 오늘날에는 LGBTQ+ 운동(성소수자 권리운동)의 저항과 해방의 상징으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현대 예술에서는 이러한 핑크를 통해 유희와 자기 표현, 탈중심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예쁜 색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다층적 기호인 셈이다.
예술과 철학의 영역에서도 핑크는 단순한 색이 아니다. 페미니스트 이론가 주디스 버틀러는 핑크 옷을 입는 행위조차 젠더 수행(performativity)의 일부라고 본다. 이는 정체성을 해체하는 하나의 정치적 실천이 될 수 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말했듯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핑크 역시 사회가 부여한 젠더 코드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사회적 저항의 형식, 핑크는 색이 아니라 ‘목
소리’다.
핑크는 감각을 자극하고, 기호학적으로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 색은 한편으로는 살갗과 같은 육체성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순결과 동심, 그리고 에로티시즘을 떠올리게 한다. 퀴어 이론에서는 이분법을 전복하는 유희적 색상으로 핑크를 읽는다. 핑크색 철학은 단순한 색채를 넘어, 문화적 담론 속에서 인간과 사회, 권력과 정체성, 실존을 사유하는 하나의 도구다.
이러한 핑크의 상징성과 K드라마의 감성은 자연스럽게 맞닿는다. K드라마는 한국적 정서, 생명력, 공감의 미학을 바탕으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다룬다. 폭력적인 현실 속에서도 따뜻한 위로와 희망을 건네며, 세계인의 피로를 달래는 ‘정서적 생존’의 서사를 제시한다. K드라마는 단순한 콘텐츠를 넘어선 소통의 매개이자, 공감과 치유의 외교 수단으로 자리잡는다.
이번 칸시리즈 부산은 단순한 드라마 축제가 아니었다. 50개국, 700개 기업, 2,300여 명의 관계자가 참여한 글로벌 협업의 장이자 새로운 문화외교의 무대였다.
핑크카펫은 그 문을 여는 상징적 열쇠였다. 한류는 단지 인기 콘텐츠를 넘어 세계인과 소통하는 창구로 기능하고 있다. 이와같은 현실 속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 정책은 전통적인 ‘가치와 공감’ 중심의 소프트 파워에서 점차 실용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경제적 실익, 보수적 가치 확산, 안보 전략과의 연계가 중심이 되며 국제사회의 피로감은 커졌다. 따뜻한 소통보다는 차가운 거래가 지배하는 외교 환경에서, 오히
려 문화의 역할은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이러한 피로감에 대한 틈새를 메우는 것이 바로 문화외교다. 그리고 지금 한국은, 인간성을 회복하는 문화적 수단으로서 지친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위태롭고 불안정한 시대에, 핑크는 더 이상 유치한 색이 아니다. 그것은 질문이다. “우리는 어떤 세계를 꿈꾸는가?”
K드라마는 그 질문에 대한, 꿈을 현실로 공유하고 실현하는 가장 인간적인 대답이다. 핑크는 바로 그 시대정신의 색이다. 치유와 저항, 공감과 유희,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문화적 펩토비스몰.
K드라마는 그 핑크빛 메시지를 담아 세계인을 위로하고 있다. 소통이 단절되고 협력이 무너진 시대에서, 문화외교는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생존 게임일지도 모른다. 핑크카펫 위에서 우리는 다시, 유쾌한 생명력을 머금고 ‘움직이지 않고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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