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출범한 지 약 한 달이 돼간다. 인공지능(AI) 분야 100조 원 투자 시대 선언과 벤처 투자 시장 40조 원 확대 공약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미래 먹거리인 벤처 생태계 육성에 대한 정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2차 추가경정예산안에도 AI 투자 확대와 모태펀드 출자 지원 등이 포함돼 모처럼 혁신 생태계 활성화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다.
현재 대한민국은 반도체·철강·화학 등 전통 기간산업의 경쟁력 저하와 첨단산업 분야의 기술 격차 심화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AI 등 디지털 기술 기반의 산업 혁신과 첨단기술 분야 초격차를 따라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미래 기술 영역뿐 아니라 기존 산업의 혁신을 위해서도 벤처기업 육성은 필수 불가결하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바로 유동성 위기로 신음하고 있는 벤처 투자 시장의 확대다.
글로벌 벤처 생태계를 살펴보면 혁신 기업의 성장과 벤처 투자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국내 벤처 투자 규모는 11조 9000억 원으로 국내총생산(GDP) 대비 벤처 투자 비율은 0.26%다. 이는 이스라엘(1.72%), 미국(1.09%) 등과 비교해 약 20% 수준에 불과하다. 이래서는 선진국을 따라잡을 수 있는 혁신 기업 육성이 요원할 수밖에 없다. 벤처 투자가 전년 대비 9.5% 증가했지만 여전히 선진국에 비해 크게 부족한 수준이다. 새 정부의 ‘진짜 경제’ 성장의 공약 실현을 위해서도 벤처 투자를 비롯한 모험자본 시장 확대와 제도화는 필수적으로 선행돼야 할 정책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벤처 업계는 대통령 선거 기간에 ‘법정기금의 벤처 투자 의무화’를 정책 공약으로 요청했다. 국내에서 운용되는 총 67개의 법정기금은 금융·산업·보건·과학기술·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올해 기준 총 자산 규모는 3000조 원, 연간 운용 규모도 955조 원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법정기금은 금융자산 운용(54.8%)과 정부 내부거래(42.5%)에 치중돼 있고 혁신 벤처기업과 신기술에 대한 투자는 미비한 수준이다.
법정기금의 벤처 투자 의무화는 법령 개정이 필수적이다. 법정기금의 투자 재원 통합 운영을 위한 법안을 신설하거나 국가재정법 개정을 통해 법정기금 운용 자산의 일정 비율 이상을 통합 운용하고 벤처기업에 투자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각 기금의 설치 목적에 위배되지 않도록 기금의 목적과 벤처기업의 역량을 연결하는 운용 전략을 추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국민건강진흥기금·응급의료기금은 디지털 헬스케어 벤처기업에, 기후대응기금은 기후테크 벤처기업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는 법정기금의 목적과 벤처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고려한 전략적 투자로, 경제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등 국가적 경제위기 때마다 벤처 생태계는 구원투수로서 큰 역할을 해왔다. 전 세계 어디에도 없던 혁신적 벤처 정책이 기여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사라진 정책의 혁신이 현 벤처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온 것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모든 혁신에는 저항이 따른다. 많은 정부 부처가 함께 논의해야 하는 혁신적 벤처 정책일수록 그 저항은 더욱 거셀 것이다. 그러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벤처 생태계 육성이 필수라면 가보지 않은 길을 과감하게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혁신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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