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지성남인 알베르 카뮈가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던진 도발적 질문이 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왜 자신이 주장했던 지동설을 철회했을까, 진리를 포기한 비겁한 과학자였을까.’ 카뮈의 답은 의외였다. ‘갈릴레이는 현명했다’는 것이다. 태양과 지구 중 무엇이 중심인지보다 자신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갈릴레이는 알았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를 통해 과학적 사실보다 인간적 가치가 먼저라는 철학자다운 선언을 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 진리를 찾는 인류의 여정에서 사실에 방점을 찍는 과학은 가치로 중무장한 철학에 앞자리를 내주고 변방을 지켰다. 그러나 갈릴레이에서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거쳐 스티븐 호킹에 이르는 과학의 대장정은 장엄했다. 수학적 논증과 객관적 검증이라는 ‘양날의 보검’을 앞세운 과학은 20세기 후반 마침내 철학을 왕좌에서 끌어내렸다.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부응해 20세기 초 기술이 사회구조, 문화적 가치, 역사적 변화를 결정짓는 핵심 동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술결정론이 등장했다. 기술결정론은 컴퓨터의 확산, 인터넷의 등장, 모바일의 일상화로 날로 기세가 등등해지더니 최근 인공지능(AI) 시대를 맞아 전성기를 맞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는 또 다른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학습하고 추론하는 AI가 속속 등장하면서 그동안 괴짜 철학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가치’가 갑자기 뜨거운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는 준비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등을 떠밀려 AI 세상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제야 깨달았다. AI라는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쥔 인류에게 정작 나침반이 없다는 것을. AI를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종 목표는 무엇인가. AI 시대에 인간만의 고유한 가치는 무엇인가. AI가 인간을 대체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본질적 질문들에 대해 인류는 빠른 답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AI는 인류에게 날개를 달아줄 것이다. 지금껏 뛰는 것이 전부였던 우리에게 비상하는 능력을 선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로 날아갈지는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 목적지를 제대로 설정하면 꿈의 땅 엘도라도에 닿을 수 있지만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디스토피아로 추락할 수도 있다. 한 손에는 첨단기술을, 다른 손에는 비즈니스 모델을 움켜쥔 거대 기업들이 국가를 능가하는 영향력을 휘두르는 빅테크 시대를 맞아 인간적 가치를 AI 개발과 활용에 어떻게 조화롭게 녹여낼 것인가.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13일 동안 핵전쟁과 평화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인류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때와 닮았다. AI라는 전례 없이 급발진한 기술 앞에서 촉박한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결과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것이다. AI라는 날개를 단 인류가 어떤 미래를 선택할지는 기술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 달려 있다. 카뮈가 갈릴레이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그 가치 말이다. 지금이야말로 사실에 밀려나 있었던 가치가 다시 무대 중앙으로 나설 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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