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에 약 1300억 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분쟁(ISDS) 판정에 불복해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제기한 항소심에서 승소했다. 이번 판결로 사건이 영국 고등법원에서 중재판정부의 재판 관할권부터 원점에서 재심리하게 되면서 한국 정부는 거액의 배상 위기를 일단 피할 수 있게 됐다.
18일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전날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의 각하 판결을 파기하고 본안 판단을 위해 사건을 1심 법원으로 환송했다. 이에 따라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본격적으로 심리하게 됐다. 이번 항소심 승소로 한국 정부가 당장 엘리엇에 배상 책임을 면한 것은 아니지만 PCA의 거액 배상 판결을 취소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됐다는 평가다.
앞서 엘리엇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승인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에 찬성표를 던지도록 압력을 행사해 7억 7000만 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2018년 ISDS를 제기했다. 당시 삼성물산 주주였던 엘리엇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위해 합병 비율이 삼성물산에 불리하게 결정됐다고 주장했다. PCA는 2023년 6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손해배상금 622억 원과 지연이자, 법률 비용 등 총 1300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법무부는 2023년 7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근거로 엘리엇이 제기한 소송이 PCA의 중재 대상이 아니라며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소송을 냈다. 정부는 FTA 협정문 11장 첫머리에 명시된 “이 장은 당사국이 채택하거나 유지하는 조치에 적용된다”는 문구가 ‘중재 청구’ 조건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PCA가 이 사건을 다루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라는 요건을 충족했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영국 1심 법원은 문구가 11장 1절에만 적용되고 2절에 나오는 ‘중재 청구’와는 관련이 없다고 보고 지난해 8월 소송을 각하했다.
반면 이번 2심 법원은 한국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 법원의 해석이 협정의 문언과 통상적인 의미에 어긋나며 다른 조항과도 충돌한다고 판단했다. 또 국제법상 조약 해석 원칙에 따라 한미 FTA의 제11조 1항이 중재판정부의 관할을 결정하는 기준이므로 한국 정부가 주장한 취소 사유는 영국 중재법에서 정한 ‘실체적 관할’에 관한 문제로 인정된다고 판시했다. 앞으로 영국 고등법원은 이 기준을 토대로 엘리엇 사건의 PCA 중재 적격성 여부를 다시 판단하게 된다.
영국 법원의 이번 결정은 전날 이 회장이 이 합병을 둘러싼 혐의를 10년 만에 벗게 된 직후에 나왔다. 대법원은 전날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행위·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19개 혐의로 기소된 이 회장에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정부 관계자는 “환송 1심 대응에 만전을 기하고 만일의 엘리엇 측 상고 제기에도 대비하는 등 앞으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해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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