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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 노동할 권리

성행경 여론독자부장

산재·임금체불 근로자 삶 위협하지만

일할 곳 없다면 노동권리 보장도 무색

재계, 노조법 개정후 파업남발 우려 커

정치권·노사 역지사지로 타협 나서야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한 후 보인 행보 중 단연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SPC삼립 시화공장 방문이었다. SPC는 계열사에서 산업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해 국민적 지탄을 받아왔던 기업이다. 이 대통령은 마치 근로감독관처럼 SPC그룹 오너와 삼립 대표이사에게 산재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를 따져 물었고 주야 12시간 맞교대 근무가 원인 중 하나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SPC그룹은 맞교대를 폐지하고 생산직 야근을 8시간 이내로 제한하기로 했다. 근무제 개선으로 산재가 줄어들지는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지지자들은 ‘소년공’ 출신 대통령이 산재 근절 의지를 몸소 실천했다며 환호했다.

고용노동부의 ‘2024년 산업재해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를 인정받은 사망 근로자는 2098명에 달한다. 전년 대비 82명(4.1%) 늘었다. 아침에 일터로 출근해서 집으로 퇴근하지 못한 근로자가 한 해 2000명이 넘는 것은 슬프고, 화나고, 부끄러운 일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도입됐는데도 산재 사망 사고가 줄어들지 않은 것은 법·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처벌이 능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29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형사처벌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다”며 사업·고용주의 인식 전환을 촉구하면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등 산재 처벌·제재 강화를 주문했다.

산업 안전 못지않게 근로자의 삶을 위협하는 것이 임금 체불이다. 근로자의 목숨을 빼앗고 몸을 다치게 하는 산재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임금 체불도 근로자의 마음을 파괴하고 그 가족의 생계를 위협한다. 임금 체불액은 2022년 1조 3472억 원, 2023년 1조 7845억 원, 지난해 2조 448억 원으로 해마다 늘고 있다. 올해는 5월 말 기준 9482억 원으로, 상반기에 이미 1조 원을 넘어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임금 체불액은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임금이 체불되더라도 아예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정부가 임금채권보장기금을 통해 우선 대지급금 형태로 근로자에게 임금을 지불하고 사업주를 상대로 구상권을 행사해 회수한다. 그럼에도 밀린 임금을 제때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이 적지 않고 생계를 꾸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여전히 많다. 근로감독을 보다 꼼꼼히 하고 피해를 보는 근로자를 최소화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산업재해와 임금 체불을 줄이는 것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경제적 안정을 뒷받침한다는 점에서 국가와 정부가 중단 없이 살펴야 할 과업이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일할 권리, 즉 노동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관세전쟁, 인공지능(AI) 혁명으로 인해 국내 일자리 감소와 산업 공동화, 노동의 성격 변화와 직업 소멸이 현실로 다가왔다. 미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트럼피즘으로 국내에서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줄어들 수 있다는 전망 속에서 하도급 근로자 보호 범위 확대와 노조의 쟁의행위에 따른 사업자의 손해배상 청구 제한 등을 담은 ‘노란봉투법(노동조합법 2·3조 개정안)’이 시행되면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 기업의 한국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이에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31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지금이라도 국회는 노동조합법 개정을 중단하고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 간 충분한 협의가 이뤄지도록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손 회장은 “원청 기업을 대상으로 한 하청 노조의 파업이 빈번하게 발생하면 원청 기업은 협력 업체와의 거래를 단절하거나 해외로 사업체를 이전할 수도 있다”며 “그로 인한 피해는 중소·영세 업체 근로자들과 미래 세대에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부는 경영계의 우려를 이해한다면서 법 통과 후 6개월간의 준비 기간 동안 전문가 논의와 현장 의견 수렴 등을 통해 매뉴얼·지침 등을 마련하겠다는 입장이다. 노동계의 지지를 업고 집권한 이재명 정부가 근로자들의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영훈 노동부 장관의 말처럼 노동계가 파업을 남발하지 않고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대화와 타협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노력을 한다면 이번 법 개정이 구조적 변화와 혁신의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명심해야 할 것은 일할 곳이 없다면 안전하고 건강한 근로 환경도 의미가 퇴색되고, 노동할 권리 보장도 무색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물론 노사에 그 어느 때보다 역지사지의 자세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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