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판 관세 위협과 무역 협상의 눈보라 속에서 미국인들은 세계 정세의 지각변동이라는 커다란 흐름을 놓치고 있다. 개방형 세계경제의 창시자이자 버팀목인 미국은 현재 모든 교역국을 상대로 거의 한 세기 만에 가장 높은 세율의 관세를 부과하고 있다. 이제 미국은 세계 주요 경제국 가운데 가장 높은 관세장벽을 구축한 국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각국의 무역장벽과 관세 철폐를 위해 지난 80년간 미국이 일관되게 추진해온 경제 및 외교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고 있다. 트럼프 정책 혁명의 효과는 오늘날의 주가가 아니라 그 결과로 나타날 미래의 세계상으로 측정돼야 한다.
협상 타결을 발표할 때마다 백악관은 미국 상품의 접근을 허용치 않던 외국시장의 굳게 잠긴 문을 트럼프가 강제로 열어젖히기라도 한 듯 자랑스레 떠벌린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유럽의 싱크탱크인 브뤼겔에 따르면 미국산 수입품에 대해 유럽연합(EU)이 부과해온 평균 관세율은 1.35%, 유럽연합(EU) 상품에 적용되는 미국의 관세율은 1.47%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자유무역 세계에서 관세는 대체로 무시해도 좋을 만큼 낮았다. 물론 비관세장벽을 지닌 국가도 더러 있지만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트럼프가 ‘해방의 날’에 제시했던 것만큼 상호관세율이 높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되는 천문학적 관세에 조건화된 탓에 투자자들은 여전히 높지만 예상보다 낮은 관세에 안도했다. 어쨌거나 미국 경제는 대체로 국내 경제에 기반을 두고 있다.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지도자들은 트럼프가 EU·일본·한국을 상대로 무역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있다고 떠들어댄다. 미국이 거대한 시장과 동맹국의 입장에서 제공하는 안보 우산을 지렛대 삼아 이들 국가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트럼프가 제대로 인지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그는 지정학적 위협이 높아지는 시기에 지정학적 현실을 이용해 미국의 가장 가까운 우방국들에 압박을 가하고 양보를 강요한다. 이에 따라 EU로 들어가는 미국산 물품에 대한 평균 관세는 1.35%에서 제로에 수렴하는 수준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작은 성과를 미국의 승리로 보는 것은 경제학을 오해하는 것이다. 무역전쟁에서 승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 미국은 자국의 소비자들에게 관세 비용의 부담을 떠맡기고 있다. 다시 말해 빈곤층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은 매우 역진적인 세금으로 미국의 소비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 저소득층에 속한 미국인들이 코스트코와 월마트 같은 매장에서 식료품과 옷을 구입할 때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미국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같은 관세가 가져올 가장 광범위한 영향은 세계경제의 기본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과거 수십년 동안 세계 각국은 글로벌 시장에 대한 정부의 임의적인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역사를 통틀어 정부는 무역을 조작해 거대한 왜곡을 초래했고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기보다는 정치적으로 강력한 국내시장 수호자들을 만들어 냈다.
미국은 이러한 경향에 맞서 성공을 거둠으로써 더 나은 길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미국의 첨단기술 업체들은 1980~1990년대 일본의 소니와 네덜란드의 필립스와 같은 시장 선도 업체들로부터 배우고 결국 이들을 뛰어넘으면서 세계시장을 석권했다. 이는 대체로 세계시장의 치열한 경쟁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진입 중인 세계는 완전히 다르다. 기업들은 세계시장 시스템의 정치학을 익히는 데 시간과 지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들은 관세가 낮은 국가에 우선적으로 물품을 운송한 다음 미국에 수출할 것이다. 관세가 붙은 상품은 실제보다 낮게 청구하고, 관세가 부과되지 않은 물품은 다양한 처리 비용을 실제보다 높게 청구할 것이다. 로비 노력도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미 미국의 최고 기업들은 면제와 특혜를 구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워싱턴을 방문한다.
모든 정부는 경제에 자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 좋아한다. 지난 80년 동안 미국은 이들을 압박해 시장의 힘에 굴복시키고, 시민사회가 국가에 맞서 힘을 얻게 만들었다. 모든 국가들이 평화를 유지하면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무역 시스템을 구축했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이 경제적·지정학적으로 서로 의존하면서 하나로 엮인 무역 생태계를 조성했다. 이처럼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계를 창조한 미국이 지금은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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