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기장을 엇갈리게 겹치면 일렁이는 무늬가 나온다. 위아래 모기장 격자끼리 어긋나면서 간섭으로 생기는 무아레(Moiré) 무늬다. 일상에선 그저 착시현상에 그치지만, 그래핀과 같은 나노 세계에선 이 무늬가 전자가 움직이는 길도 바꾼다. 무늬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나노 소자, 양자 재료를 만들어낼 수 있는데, 원자는 자리가 고정돼 있어 무늬를 바꾸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국내 연구진이 금속-유기골격체(MOF, Metal-Organic Framework)를 이용해 무아레 무늬의 길이를 분자 단위로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세계 최초로 구현해냈다. 기존 그래핀 기반 구조에선 어려웠던 조절성을 확보한 것으로, 복잡한 대칭 무늬까지 정교하게 구현했다.
울산과학기술원(UNIST) 화학과 최원영 교수팀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지한 교수팀, 포항공과대학교(POSTECH) 박선아 교수와 함께 MOF를 활용해 분자 단위로 무아레(Moiré) 무늬의 주기를 정밀 제어해냈다고 18일 밝혔다.
연구팀은 MOF의 높은 설계 자유도를 활용했다. MOF는 금속 이온과 유기 분자가 그물망 형태로 결합한 나노물질로, 유기물의 종류와 길이를 바꿔 그물망의 크기와 간격을 조절할 수 있다.
연구팀은 지르코늄(Zr) 기반의 종이처럼 얇은 MOF층(layer) 만들고, 위아래의 MOF 층이 엇갈릴 수 있도록 다른 각도로 겹쳐 쌓았다. 투과전자현미경으로 관찰한 결과, 두 MOF 층의 엇갈린 각도와 유기 분자의 길이 등에 따라 무늬의 형태와 주기가 달라지는 것을 실제로 확인했다.
무아레 무늬 속에 숨겨진 준주기적 대칭 구조도 수학적 분석을 통해 드러났다. 두 MOF 층을 30도 회전시켰을 때, 고딕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나 모스크의 아라베스크 장식에서 볼 수 있는 12각형 대칭 구조, 이른바 ‘스템플리 타일링(Stampfli tiling)’ 패턴이 나타난 것이다. 이 무늬는 언뜻 보면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확히 같은 배열이 어디에도 반복되지 않는 준주기성이 있다.
제1저자인 김지연 박사(현 막스플랑크연구소 박사후 연구원)은 “준주기적 패턴은 전자의 움직임에 미세한 변화를 줄 수 있어, 무아레 구조의 전자·광학적 성질을 더 정밀하게 설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이 무늬들이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닌 실제로 안정적인 구조인지도 이론적으로 검증했다. KAIST 김지한 교수팀은 분자동역학(MD) 시뮬레이션을 수행해 각 회전각에서 형성된 MOF 겹층 구조의 상대적인 에너지 안정성을 계산했으며, 그중 일부 구조는 에너지적으로 가장 안정한 형태로 나타나 실험 결과를 뒷받침했다.
최원영 교수는 “MOF는 분자 단위로 구조를 설계할 수 있어, 마치 다이얼을 돌리듯 무아레 주기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며, “이번 성과가 트위스트로닉스(twistronics)나 새로운 종류의 양자 물질 활용의 물꼬를 열었다”고 강조했다. 트위스트로닉스는 두 층의 물질을 비틀어 쌓았을 때 생기는 무아레 패턴을 이용해 전자 특성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Nature Communications)에 8월 13일자로 게재됐다. 연구 수행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한국연구재단, 정보통신기획평가원 등의 지원을 받아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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