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당국이 경영난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 업계에 필요에 따라서는 대주주가 사재 출연을 해야 한다며 강하게 압박하고 나섰다. 당국이 전 금융권이 참여하는 채권단 협약을 추진하고 있는 만큼 제대로 된 고통 분담 없이는 대출 지원이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금융 당국의 고위 관계자는 20일 “구조조정의 대원칙은 대주주의 책임”이라며 “필요하다면 오너가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회사채는 (은행권의 자금 지원이 아닌) 기본적으로 기업 돈으로 상환해야 한다”며 “수십 년간 배당을 챙겨갔으면서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식의 행동은 문제가 있다”고 경고했다.
여천NCC만 해도 공동 주주인 DL과 한화가 회사 설립 이후 25년 동안 배당으로 가져간 금액만 각각 2조 2000억 원이다. 하지만 DL과 한화는 1500억 원씩 총 3000억 원을 빌려주는 형태로 지원하는 데 그쳤다. 증자가 아닌 대여라는 점에서 채권단 사이에서는 “대주주가 최소한의 책임도 안 지려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이에 금융 당국과 채권은행들은 석유화학 기업들에 대한 포괄적 금융 지원 협약을 체결하되 그 전제 조건으로 대주주의 자구 노력을 강하게 요구하기로 했다. 생산량 감축은 물론 기업이 자체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을 최대한 투입해야 금융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다.
채권단 사이에서는 배당금을 기준으로 금융 지원 규모를 결정해야 한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대주주가 그동안 받아간 배당금이 다른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경우에는 지원 규모를 과감하게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국책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수십 년간 조 원 단위의 배당금을 챙겨 놓고 백억 원대 분기 적자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며 “대주주가 증자를 하든 사재를 내놓든 뼈를 깎는 노력을 먼저 보여야 한다”고 비판했다.
주요 석유화학 기업마다 만기를 코앞에 둔 대출금이 많게는 수천억 원에 이르는 만큼 채권단의 고강도 압박을 외면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여천NCC만 해도 18일 기준 3개월 내 만기가 도래하는 대출채권 규모가 5299억 원에 달한다. 이 중 국책은행 대출만 약 1200억 원이다.
대출 만기 연장이나 상환 유예 등을 좌우하는 채권단 동의 기준도 높게 설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금융 협약과 성격이 유사한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주단 협약’을 보면 전체 채권단의 4분의 3의 동의를 받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다. 채권은행의 한 관계자는 “채권단 사이에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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