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수놓는 ‘서울라이트 DDP’는 초가을을 여는 도시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세계적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한 DDP의 222m 곡선형 외벽은 거대한 캔버스로 변신해 빛의 미디어아트를 펼치며 해마다 138만 명을 끌어모은다. 올해도 프랑스 현대미술가 로랑 그라소와 대만 미디어 아티스트 아카 창 등이 참여해 서울 밤하늘을 예술로 물들이고 있는 중이다.
올해 DDP의 9월은 한층 특별해졌다. 소장 가치가 높은 ‘콜렉터블 디자인’이 대거 소개되는 장소로 정평이 난 ‘디자인 마이애미’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매년 12월 미국에서 열리는 영향력 있는 디자인 페어가 프랑스 파리에 이어 두 번째 해외 개최지로 서울을 선택했다. 1일 개막한 행사는 서울이라는 장소적 맥락을 살린 ‘특별전(In situ)’ 형태로 진행돼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는 한국 디자이너와 공예 작가 70여 명을 중심으로 170여 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에 모인 세계 각국의 디자인 전문가와 컬렉터 앞에서 한국 디자인의 독창성과 저력을 보여주는 무대가 열린 셈이다.
이 변화의 중심에는 차강희 서울디자인재단 대표가 있다. 서울이 디자인 도시를 표방해온 만큼 국제적인 디자인 페어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계속 있었지만 이제껏 현실화되지는 못했다. 20년 이상 LG전자의 ‘슈퍼 디자이너’로 일하며 ‘초콜릿폰’ ‘프라다폰’ 등을 탄생 시킨 30년 경력의 전문가이자 산업디자이너협회 대표와 학계까지 두루 섭렵한 차 대표가 지난해 10월 재단 수장에 오르며 논의는 비로소 급물살을 탔다.
“재단이 디자인 도시를 목표로 달려온 지난 과정을 돌아보면 ‘디자인 문화의 확산’ 측면에서는 분명한 성과를 냈습니다. 하지만 산업적 기반까지 키우지는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죠. 산업을 일으키려면 우선 시장 규모를 더 키워야 하지 않을까요. 한국 디자인이 내수용에 그치지 않고 세계로 뻗어갈 수 있도록 힘을 실어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글로벌 양대 아트페어(미술품 장터) 플랫폼인 ‘프리즈’가 한국의 유서 깊은 아트페어 ‘키아프’와 손잡고 2022년 서울에서 ‘프리즈 서울’의 막을 올린 이후 ‘9월의 서울’은 전 세계 아트·디자인 관계자들이 주목하는 도시가 됐다. 게다가 ‘오징어 게임’ ‘흑백 요리사’ 등 K콘텐츠가 연달아 흥행하고 최근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며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에 대한 세계의 관심이 높아졌다. 차 대표는 “글로벌 MZ세대에게 지금 한국과 서울은 문화적으로 가장 ‘핫’한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며 “서울에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다들 궁금해하던 때 우리가 적절하게 디자인 마이애미의 서울 개최를 제안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그동안 디자인 마이애미를 찾았던 주요 인사들은 미국과 유럽처럼 비슷한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비슷한 작품들을 계속 봐 왔던 사람들”이라며 “좀 더 새롭고 신선한 무언가를 필요로 하던 그들에게는 ‘왜 서울’이 아닌 ‘당연히 서울’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이번 행사는 디자인 마이애미 측에서도 일종의 ‘테스트’와 같은 측면이 있다.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에 따라 내년에도 행사가 열릴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뜻이다. 차 대표는 자신 있는 모습이다. 그는 “사실 서구의 컬렉터 등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한국을 찾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한 번 방문했을 때 가능한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가기를 원한다”며 “파인아트 쪽 대형 페어인 ‘키아프리즈(키아프+프리즈)’에 이어 미디어아트인 DDP의 ‘서울라이트’와 대형 설치 작품 위주의 야외 전시인 ‘디자인&아트’, 그리고 ‘디자인 마이애미’까지 더해지면서 서울은 창의적 생태계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일각에서는 너무 많은 행사가 겹쳐 관객이 분산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지만 시너지 효과가 훨씬 크다”며 “서로 다른 장르와 네트워크가 교차하며 방문객들의 체류 기간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서울에 대해서도 창조적 경험이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도시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국제 행사인 디자인 마이애미 유치는 차 대표가 꿈꾸는 ‘글로벌 디자인 허브 서울’을 위해 끼운 첫 단추이다. 재단이 운영하는 DDP는 이미 디자인 관련 전시나 행사·세미나가 매일같이 열리는 명실상부 ‘한국 디자인의 메카’가 됐지만 차 대표가 바라보는 곳은 세계다. 그는 “지금까지는 우리가 해외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가져오고 받아들이면서 성장했지만 이제는 우리 것을 세계에 알리고 또 우리가 주축이 돼 세계의 것을 한국에서 만들어갈 수 있는 실력이 됐다”며 “서포터의 역할이 아니라 주인공으로서 DDP가 성장하는 것이 나의 비전”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목표점은 매년 4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 최대의 디자인 축제 ‘살로네 델 모빌레’이다. 차 대표는 “이때 밀라노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쇼룸이 돼 전 세계 디자이너를 끌어들인다”며 “4월에 밀라노가 있다면 9월은 서울이 그 자리를 차지해 볼 수 있지 않을까”라고 포부를 밝혔다.
단숨에 도착하기 어려운 목표지만 세부 계획도 이미 세워뒀다. 먼저 한국 디자인을 세계에 알릴 ‘스타 디자이너’를 키우려고 한다. 그는 “사실 한국은 이미 상당한 디자인 경쟁력을 확보한 나라이고 우리가 만든 전자 제품이나 화장품·패션 등의 수준이 굉장히 높다는 것도 다들 잘 안다”며 “다만 ‘그래서 누가 제일 잘하느냐’는 질문에는 대답할 만한 ‘스타’가 없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우리나라 피겨 스케이팅이 아무리 수준이 높아졌더라도 김연아 선수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축구를 아무리 잘한다 해도 박지성과 손흥민 선수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자긍심을 가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어떤 분야든 세계적으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스타가 필요하고 또 스타들이 계속 배출돼야 하는 것이죠.”
이 같은 생각을 토대로 차 대표는 10월 ‘서울 디자인 위크’를 통해 소개되는 모든 작품에 디자이너의 얼굴도 함께 띄우려고 한다. 어떤 디자이너가 좋은 제품을 만들고 있는지 공개하고 우수한 디자이너가 다시 멋진 제품을 완성하는 선순환을 완성하겠다는 취지다. 올해 디자인 마이애미를 통해 알리고 싶은 핵심도 세계에서 독보적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면면이다.
창업과 같은 디자인 산업의 전반적 육성도 재단이 방점을 찍는 분야다. 신진 디자이너와 스타트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DDP가 위치한 동대문 상권 및 국내외 기업들과의 협력을 심화해 ‘아이디어가 산업이 되고 산업이 문화가 되는’ 창조 생태계를 꾸려가겠다는 포부다. “좋은 디자인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디자인을 알아보고 지지해주는 좋은 파트너가 필요하다”는 오랜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디자인 문화 확산과 교육에도 힘을 기울인다. DDP를 교육과 커뮤니티·아카이빙이 결합된 복합 문화 공간 ‘라키비움(도서관+기록관+박물관)’으로 재탄생시키겠다는 구상 등이 올해 1월 밝힌 그의 비전 ‘뉴퍼스펙티브’에 담겼다.
“도시에는 그 장소에 살고 있는 인간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법입니다. 서울에 디자인과 아트가 가득하더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허덕인다면 예쁜 디자인도 모두 허상이 되겠죠. 문화는 물론 디자인 산업까지 활성화시켜 디자인을 중심으로 선순환이 이뤄지도록 서울시민의 삶이 디자인으로 좀 더 풍요로울 수 있도록 우리가 좀 더 노력하겠습니다.”
he is… △1962년 인천 △2013년 홍익대 산업디자인 박사 △1999~2020년 LG전자 디자인연구소 상무 △2018~2021년 한국산업디자이너협회 회장 △2018~2024년 홍익대 산업미술대학원 교수 △2024년 10월~ 서울디자인재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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