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 조달 과정에서 재무적 투자자(FI)와 맺는 적격 상장(Q-IPO) 조항이 기업들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중복 상장을 둘러싼 여론 부담이나 업황 악화로 섣불리 기업공개(IPO)를 추진하기 어려운 상황 속 추가 재무 지출 가능성이 커지자 일부 기업은 투자금을 조기 상환하려 새로운 FI를 물색하고 있다.
1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콘텐츠 제작사 SLL중앙은 과거 투자받은 4000억 원을 차환하기 위해 새로운 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SLL중앙은 2021년 상장 전 지분 투자(프리 IPO)를 통해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 프랙시스캐피탈과 중국 텐센트에게서 4000억 원을 받았다. 이때 2024년까지 IPO를 완수하는 적격 상장 조항을 계약서에 넣고 기한을 1년씩 두 번 연장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 카드를 모두 소진해 내년까지는 상장을 마쳐야 한다. 상장이 이뤄지지 않을 시 FI는 주주 간 계약에 따라 SLL중앙 경영권 매각을 주도할 수 있다.
SLL중앙은 ‘흑백요리사’와 ‘재벌집 막내아들’ 등 다수의 히트작을 내놓은 제작사다. 국내 콘텐츠 산업을 주도하는 주요 기업으로 꼽히지만 업계 전반적으로 수익성이 악화하면서 적자가 지속되고 있다. 여기에 동종 기업인 스튜디오드래곤 주가가 2021년 초 10만 원대에서 최근 4만 원대로 내려오는 등 부진한 상황이다. 경영권 매각을 피하기 위해 IPO를 강행하더라도 심사 기관인 한국거래소가 상장 예비심사를 통과시킬 가능성이 낮은 만큼 새로운 투자 유치를 통한 차환이라는 선택지를 고려하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마찬가지로 2026년까지 증시에 올라야 하는 적격 상장 조항을 가진 SK에코플랜트는 기한 연장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환경 자회사 리뉴어스·리뉴원 등을 글로벌 투자회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매각하고 반도체 관련 자회사를 흡수합병하면서 IPO를 위한 ‘몸집 만들기’에 나섰지만 최근 금융 당국 징계로 상황이 급변했다. 금융위원회 산하 증권선물위원회는 이달 회계처리 기준 위반을 이유로 SK에코플랜트에 중징계 처분을 내렸다. SK에코플랜트는 기한 내 상장이 무산될 시 계약에 따라 FI에 매년 배당금을 늘려 지급해야 한다.
적격 상장 기한 도래 이전 투자금을 상환한 기업은 다수다. 최근 합병 절차를 밟고 있는 SK온과 SK엔무브가 대표적으로, 두 기업의 모회사인 SK이노베이션은 SK엔무브의 FI인 IMM크레딧솔루션(ICS)이 보유한 지분 30%를 8593억 원에 매입했고, SK온 FI 지분도 3조 6000억 원에 되사왔다. 과거 일정 시점까지 IPO를 진행해 FI가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도록 한 관행이 다수 기업들의 발목은 잡은 모습이다.
IB 업계 관계자는 “투자 유치 단계에서는 원활한 자금 조달을 위해 FI에게 상당한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며 “상장에 살패하면 재무 부담이 크게 늘어나는 구조여서 기업들이 차환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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