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메뉴

검색
팝업창 닫기
이메일보내기

바닷바람 속 풍경이 된 일본 자판기 [임병식의 일본, 일본인 이야기]

임병식 순천향대학교 대우교수/국립군산대학교 특임교수

인적이 드문 일본 사이키 해안 마을에 설치된 음료 자판기 모습. 사람은 떠나고 폐가만 즐비한 한적한 마을에도 어김없이 자판기는 있다. /사진 제공=임병식




‘일본에 왔구나’ 하는 인상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가 자판기다. 일본을 여행하다 보면 정말이지 많은 곳에서 다양한 자판기와 만난다. 도쿄 번화가, 시골 기차역 플랫폼, 고즈넉한 신사, 공원 산책길, 지하철역, 아파트 입구, 골프장까지 없는 곳이 없다. 심지어 이런 곳에까지?라며 놀라게 되는 곳에도 어김없다. 자판기 종류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자판기에서만큼은 일본인은 한국인의 창의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전통적인 음료나 담배, 스낵 자판기는 물론이고 컵라면, 아이스크림, 라면, 우동 자판기까지 무궁무진하다. 심지어 냉동식품과 술, 야채, 과일, 꽃, 부케, 우산, 속옷 자판기까지 있으니 ‘자판기 왕국’이라는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기계가 아니다. ‘길거리 실험실’이다. 편의·놀이·지역성·비상용품까지, 아이디어와 기술이 더해져 작은 무인 상점처럼 진화하고 있다. 일본 여행에서 이색 자판기 탐방은 흥미로운 경험이다. 도쿄 아키하바라의 ‘수프 자판기’, 홋카이도 농가의 ‘옥수수 자판기’, 니가타의 ‘사케 자판기’처럼, 색다른 자판기를 찾는 일은 여행에 소소한 재미를 더한다. 길모퉁이마다 서 있는 자판기에서 버튼을 눌러 캔 커피가 “톡” 하고 떨어지는 순간, 묘하게 일본답다는 생각이 든다. 개인적으로 에치코유자와 역에서 기억은 각별하다. 소설 ‘설국’의 무대에서 자판기 사케를 마시는 순간 소설 속 감흥으로 빠져들었다.

2024년 말 기준 일본에는 약 391만 대의 자판기가 있다. 그중 220만 대는 음료 자판기다. 일본 인구가 1억 2400만 명이니 30명 남짓에 한 대꼴이다. 2000년대 초반 560만 대에 비하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밀도다. 지난달 규슈 여행길에서 그 숫자가 단순 통계를 넘어선 ‘생활의 풍경’임을 새삼 실감했다. 오이타 현 사이키 시 해안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서였다. 가는 내내 만난 자동차라고는 두서너 대가 고작인 오지였다. 한적한 해안도로와 바닷바람이 스치는 방파제 끝에서 빨간색 자판기를 만났다. 누가 이런 곳에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할까 싶었다. 뜨거운 모래바람이 흩날리는 오후 버튼을 눌렀다. 금세 물방울 맺힌 차가운 우롱차가 나왔다. 유령 같은 마을에서 자판기만 살아 움직였다.

폐교한 지 오래된 소학교 정문 앞에도 붉은색 자판기가 설치돼 을씨년스러운 마을 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일본에서 자판기 문화가 번창한 배경에는 사회적 토양이 깔려있다. 무엇보다 치안이 좋아 도난 위험이 적고 파손 위험이 적다. 인적이 드문 해안도로에도 자판기를 세워둘 수 있는 이유다. 인파가 붐비는 지하철역 등 고밀도 생활권과 협소한 골목상권도 자판기와 잘 맞는다. 자판기는 좁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효율적 수단이다. 다른 하나는 편의성이다. 오랜 시간 일하고 늦게까지 이동하는 사회에서, 24시간 언제든 물 한 병, 커피 한 캔을 살 수 있다는 건 큰 안도다. ‘항상 그 자리에 있다’는 믿음은 작은 위안이다. 현금 사용 비중이 높은 생활 습관도 자판기 문화와 맞물려 있다. 지금은 현금뿐만 아니라 교통카드나 QR결제도 보편화 됐다. 유연한 결제 방식은 자판기 사용을 한층 편하게 만들었다.

산토리·아사히·코카콜라 제조사들은 자판기를 거대한 유통망으로 삼는다. 도매상과 소매 점포를 거치지 않고도 자판기를 통해 신제품 시장조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곧바로 소비자 반응을 확인하고, 가격 전략을 기민하게 바꿀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기업의 이런 ‘직접 소매’ 전략은 일본의 자판기 문화를 지탱하고 있다. 물론 모든 게 순탄한 것은 아니다. 인구 감소와 편의점 확산, 물가 상승은 수익성이 떨어지는 자판기를 줄이는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전에 비해 자판기가 감소한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빈자리를 새로운 자판기가 채운다. 지방 특산 음료, 한정판 간식, 심지어 수소 전원으로 움직이는 친환경 자판기까지 등장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판매 기계를 넘어 ‘작은 길거리 이벤트 상점’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일본 유라 포구와 사이키 해안을 잇는 지방도로를 달리노라면 길모퉁이마다 서있는 자판기가 이채롭다.


오이타 사이키 해안가에서 만난 자판기는 곧 사라질 소도시의 애잔함을 담고 있다. 사람은 떠나고 폐가만 늘어나는 곳에서 자판기도 조만간 자취를 감출 게 분명하다. 여름 한낮 텅 빈 마을을 도는 동안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이미 오래전 폐교한 게 분명한 소학교 정문은 출입을 막는 쇠줄이 걸려 있었다. 그럼에도 입구에는 어김없이 코카콜라 로고가 선명한 자판기가 있었다. 누가 여기까지 와서 자판기를 이용하는 것인지 도무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다 들리는 눈먼 관광객을 상대로 푼돈이라도 벌어보려는 심산에서 설치한 것은 아닌지 짐작할 뿐이다. 인적이 드문 황량한 마을에도 여전히 “언제나 거기 있는” 자판기는 을씨년스러운 마을풍경과 묘한 대비를 이뤘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일본 사회의 단면이다.

마을을 떠나기 전, 방파제에 앉아 파도 소리를 들으며 우롱차를 한 모금 마셨다. 눈앞에는 바다, 옆에는 자판기가 쓸쓸히 서 있었다. 일본에서 자판기는 단순한 기계가 아니다. 그들이 만들어낸 삶의 방식이자 풍경을 담은 거리의 소품이다.

서경In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

서울경제를 팔로우하세요!

서울경제신문

텔레그램 뉴스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