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격렬하고 양극화된 논쟁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미국에서 전문 직업인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당시의 워싱턴 분위기를 떠올렸다. 당시 정가의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로널드 레이건 시대의 절정기였던 1986년 필자는 정치 잡지였던 뉴 리퍼블릭의 말단 기자 겸 연구원이었다. 뉴 리퍼블릭은 중도 좌파 성향의 간행물이었지만 이곳의 저명한 논객인 찰스 크라우트해머, 프레드 반스와 앤드루 설리번은 확고한 보수주의자였다. 매주 편집회의 때마다 그들은 레이건 대통령이 그랬던 것처럼 격렬하면서도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팽팽한 설전을 벌였다. 레이건 대통령은 민주당을 맹렬하게 비난하다가도 일과가 끝난 뒤에는 민주당 소속 팁 오닐 하원의장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사이좋게 술잔을 기울이고는 했다.
오늘날의 워싱턴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옵서버들은 저마다의 입맛에 맞는 다양한 통계를 끌어왔다. J D 밴스 부통령은 우파보다 좌파에 속한 사람들이 정치 폭력을 묵인하는 성향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여론조사 응답자들의 반응을 도널드 트럼프 시절에 국한시킨다면 대체로 정확한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좌파보다 우파 쪽에서 저지른 폭력 행위가 훨씬 많았던 것 또한 어김없는 사실이다. 중도 우파 싱크탱크인 카토인스티튜트 등이 내놓은 3건의 별개 보고서가 이 같은 추세를 지적했다.
그러나 가장 의미 있는 통계는 공화당과 민주당에 상대 당이 정치적 폭력을 얼마나 지지하는지 평가해달라고 요청한 설문조사에서 나왔다. 각 당의 구성원들은 정치 폭력에 대한 상대 당의 지지를 실제보다 4배나 높게 추산했다. 예를 들어 민주당의 정치 폭력 지지는 100점 만점에 10점 정도였지만 공화당은 40점으로 평가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감정적 양극화라고 부른다. 이슈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기보다 상대가 나쁘다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지난 몇 년 사이에 감정적 양극화가 이토록 커진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의 뉴 리퍼블릭 시절, 중요한 토론은 보통 2가지 이슈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하나는 경제였고 다른 하나는 소련에 관한 문제였다. 이런 쟁점을 둘러싸고 편집회의에서 종종 심각한 의견 대립이 있었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절충점을 찾았다. 외교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리처드 닉슨과 레이건 같은 공화당의 매파조차 그들의 입장을 누그러뜨리고 소련과 협상을 벌였다.
소련 붕괴 후에는 종교와 연결된 문화적·사회적 쟁점들이 새로이 떠올랐다. 낙태·동성애권·이민 등의 이슈와 관련해 손쉬운 타협점을 찾기란 더욱 힘들어 보인다. 수십 년 전 민주·공화 양당은 다양한 이념과 견해를 포용하는 빅텐트 정당이었다. 민주당 내에서도 낙태 지지와 반대 의견이 공존했고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서도 추방과 사면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양당은 이념적 일관성을 지닌 2개의 그룹으로 갈라섰고 이로 인해 분열이 무기화되면서 공통분모를 찾으려는 동기가 약화됐다. 상대당이 단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아니라 사악하다고 생각한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문제에 대해 타협할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워싱턴과 소셜미디어에서 터져나오는 고성 너머에서 미국인들은 묵묵히 다양한 이슈에 대한 타협안을 모색하고 있다. 낙태 문제에 대해 각 주의 의원들은 임신중절 제한, 부모 동의 등과 같은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표준을 제시하며 협상을 벌이고 있다. 우파 진영은 한때 완전한 금기였던 동성애권을 폭넓게 받아들였고 민주당 시장들은 노숙자 문제에 대한 보수적인 비판을 수용했다. 이민과 관련해서도 사람들은 문제의 양면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망명 정책이 실패로 끝났고 이를 재조정해야 할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대중의 상당수는 법을 준수하고 세금을 납부하면서 이 나라에서 수십 년 동안 생활해온 서류 미비 체류자들을 잔인하고 무자비하게 추방하는 것에 분명히 반대한다.
이 나라에는 숱한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보이는 3억 400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부분적인 승리, 반쪽짜리 미봉책, 중재된 타협을 받아들일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오늘날 워싱턴에서는 그 누구도 감히 이런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한다. 지지 기반과 소셜미디어 자경단원들에게 뭇매를 맞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날마다 각 주에서 작은 방식으로라도 부분적인 승리 등을 실제로 실현해가고 있다는 것은 작은 진전의 징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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