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에 이어 또 다시 ‘비핵화 거론 포기’를 조건으로 북미 대화를 촉구하고 나선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뉴욕 UN 총회에서 1시간이나 연설을 하면서도 관련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다. 김정은이 중국과 러시아를 뒷배에 두고 연일 핵 보유국 인정, 제재 완화를 다급하게 조르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이 아직은 우선 순위가 아니라는 신호를 준 것으로 보인다. 재집권 이후 몇 달 사이에 가자 지구 분쟁, 미중 관세 휴전, 우크라이나 전쟁,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염두에 둔 내부 좌파와의 전쟁, 이민 단속 강화 등 수많은 현안을 떠안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의 만남을 얼마나 서두를지는 여전히 불확실한 것으로 평가된다. 집권 1기와 달리 북한 핵보유를 전제로 한 대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에 별다른 이점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이다.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거나 그에 준하는 약속을 하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분쟁을 해결했다’는 업적 성과로 인정받기 어려워 북한판 ‘핑퐁 외교’도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일각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트럼프 대통령의 성향상 다음 달 말 경북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판문점 등에서 김정은과 다시 한 번 깜짝 회동을 가질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하고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김정은 “비핵화 털면 트럼프와 못 만날 이유 없다…통일은 필요 없어”
지난 22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에 따르면 김정은은 21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3차 회의에서 이례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사상 처음으로 직접 거론하며 연설했다. 이는 북한의 현 경제 상황이 미국의 도움을 시급하게 요구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김정은은 이날 “나는 아직도 개인적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다”며 “만약 미국이 허황한 비핵화 집념을 털어버리고 현실을 인정한 데 기초하여 우리와의 진정한 평화 공존을 바란다면 미국과 마주 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정은은 그러면서도 “단언하건대 우리에게는 비핵화라는 것은 절대로, 절대로 있을 수 없다”며 “핵을 포기시키고 무장해제시킨 다음 미국이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해서는 세상이 이미 잘 알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제재 풀기에 집착하여 적수국들과 그 무엇을 맞바꾸는 것과 같은 협상 따위는 없을 것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며 “제재나 힘의 시위로써 우리를 압박하고 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고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주장했다.
김정은은 한국을 향해서도 “한국과 주변 지역 그의 동맹국들의 군사 조직과 하부 구조는 삽시에 붕괴될 것이고 이는 곧 괴멸을 의미한다”며 핵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이어 “마주앉을 일이 없고 그 무엇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체 상대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가 미국화된 반신불수의 기형체, 식민지 속국이며 철저히 이질화된 타국”이라며 “결단코 통일은 불필요하고 어느 하나가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될 통일을 우리가 왜 하겠느냐”고 반문했다.
김정은은 이재명 대통령의 ‘중단·축소·비핵화 3단계 비핵화론’을 두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며 강하게 선을 그었다. 김정은은 “우리의 무장해제를 꿈꾸던 전임자들의 숙제장에서 옮겨 베낀 복사판”이라며 “우리는 명백히 우리와 한국이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이고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여정도 지난 7월 29일 대미 담화를 통해 “우리 국가의 불가역적인 핵보유국 지위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지정학적 환경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며 “새로운 사고를 바탕으로 다른 접촉 방식을 모색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촉구했다. 이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은 자기의 현 국가적 지위를 수호함에 있어 그 어떤 선택안에도 열려 있다”며 “우리 국가수반과 현 미국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가 나쁘지 않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여동생의 외침에도 트럼프 대통령이 구체적인 반응을 하지 않자 이른바 ‘최고 존엄’인 오빠가 직접 나선 모양새다. 지난 3일 중국 전승절 80주년 열병식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나란히 선 자신감이 북미 대화 동력이 됐다는 분석도 있다.
외신에 따르면 북한은 이번 UN 총회에 김선경 외무상 부상도 파견한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고위급 파견을 멈춘 지 7년 만이다. 외교가에 따르면 김선경은 오는 29일 UN 총회 일반 토의에서 연설할 가능성이 높다. 김정은의 적극적인 손짓에 한국 증시에서는 일신석재, 아난티, 부산산업, 대아티아이 등 남북경협주가 일제히 상승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UN서 北 언급 한번도 안 해…"모두가 내게 노벨평화상 받으라 해"
UN 총회 직전 김정은까지 나서서 대화를 재촉했음에도 정작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 과정에서 이 문제를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2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UN본부에서 열린 총회에서 약 1시간이나 일장 연설을 하면서도 북한과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말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신 “나는 7개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이들 국가의 지도자들과 협상했지만 협상 타결을 돕겠다는 UN의 전화를 한 통도 받지 못했다”며 “모두가 이 모든 업적 하나하나에 대해 내가 노벨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 얘기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러시아가 만약 종전 합의를 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미국은 피를 매우 빠르게 멈추게 할, 매우 강력한 관세 조치를 실행할 준비가 완전히 돼 있다”며 “중국과 인도는 러시아산 원유를 계속 구매함으로써 전쟁의 주요 자금 공급원 역할을 하고 있는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국가조차도 관련 제품을 끊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나아가 기후 변화를 가리켜 “전세계에 저질러진 최대의 사기극”이라고 비난한 뒤, 이민 정책과 관련해서는 “만약 당신이 불법적으로 미국에 들어온다면 감옥에 가거나, 당신이 왔던 곳으로 돌아가거나, 어쩌면 더 먼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이란 핵과 관련해서는 “세계 1위의 테러 지원국이 가장 위험한 무기(핵무기)를 갖도록 허용할 수 없다”고 밝혔고, 관세 정책에 대해서는 “영국, 유럽연합(EU), 일본, 한국, 베트남,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 수많은 국가와 역사적인 무역 합의를 잇달아 성사시켰다”고 자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기 집권 시절인 2017~2020년에는 4년 연속으로 UN 총회 연설을 하면서 북한을 세 번이나 비중 있게 거론했다. 2017년 에는 김정은을 ‘로켓맨’이라고 칭해 이를 유행어로 만들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당시 “미국과 동맹을 방어해야 한다면 북한을 완전히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을 것”이라고 강하게 압박하다가 2018년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직후 UN 총회에서는 “우리는 대담하고 새로운 평화 추구로 대체하기 위해 북한과 대화하고 있다”며 메시지 내용을 바꿨다. 2019년 2월 베트남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직후 UN 총회에서는 북한이 엄청난 잠재력으로 가득 한 나라라며 “이런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 북한을 비핵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코로나19 대유행(팬데믹)에 따라 화상으로 참여한 2020년 UN 총회에서는 북한 문제를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李대통령 “북핵 동결, 트럼프·김정은 합의시 수용…흡수통일 안해”
대화 가능성을 두고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간 긴장 관계가 조금씩 고조되자 이 대통령도 북미 가교 역할에 시동을 걸었다. 이 대통령은 23일 UN 총회에서 일곱 번째 기조연설자로 나서 “대한민국은 ‘END 이니셔티브’로 한반도 냉전을 끝내고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한 책임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END는 교류(Exchange), 관계 정상화(Normalization), 비핵화(Denuclearization)의 약자다. 이 대통령은 “END를 중심으로 한반도에서의 적대와 대결의 시대를 종식해야 한다”며 “교류 협력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지속가능한 평화의 길을 열고 북미 사이를 비롯한 (북한과) 국제사회의 관계 정상화 노력도 지지하고 협력하겠다”고 강조했다.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서는 “엄중한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단기간에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냉철한 인식의 기초 위에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할 시점”이라며 “핵과 미사일 능력 고도화에 대한 ‘중단’부터 시작해 ‘축소’의 과정을 거쳐 ‘폐기’에 도달하는 실용적·단계적 해법에 국제사회가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김정은이 극도로 거부한 자신의 3단계 비핵화론을 또 꺼낸 것이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상대의 체제를 존중하고 어떤 형태의 흡수통일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일체의 적대행위도 할 뜻이 없음을 다시 분명히 밝힌다”며 “이 세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우선 남북 간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과 적대 행위의 악순환을 끊어내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 대통령은 이와 함께 “새로운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완전히 복귀했음을 당당히 선언한다”며 지난해 12·3 비상계엄 사태를 두고 “친위 쿠데타로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대한국민의 강렬한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고 평가했다. 국제 사회의 당면 공통 과제 해결법으로는 ‘다자주의적 협력’을 제시했다. 다자주의는 최근 중국 시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의 일방주의에 맞서 공식 석상마다 강조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은 “같은 문제를 겪는 모든 국가가 함께 머리를 맞대는 다자주의적 협력을 이어갈 때 평화와 번영의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다음 달 경주에서 열릴 APEC 정상회의에서 인공지능(AI) 미래 비전을 공유하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이 대통령은 이에 앞서 22일 보도된 BBC와의 인터뷰에서는 “북핵 동결이 임시적 비상조치로서 실행 가능하고 현실적인 대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이 북한 핵무기 제거 대신 핵무기 생산을 동결하는 내용에 합의한다면 이를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우리가 비핵화라는 장기적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한, 북한이 핵·미사일 개발을 중단하도록 하는 것에는 명백한 이점이 있다고 믿는다”고 부연했다.
이 대통령은 같은 날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중국이 현 북한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묻는 질문에는 “알 수 없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최근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밀착 움직임에 우려를 표시하며 “이 상황은 한국에 매우 위험하고 우리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이 대통령은 이 인터뷰에서 한미 관세 협상을 두고는 “통화 스와프(화폐 맞교환) 없이 미국이 요구하는 방식으로 3500억 달러(약 488조 원)를 인출해 전액 현금으로 투자한다면 한국은 1997년 금융위기와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이라며 “혈맹 간에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은 한미 방위비 문제도 무역 협상과 분리하길 원한다며 최근 미국 조지아주 근로자 구금 사태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우에 한국인들이 분노했고, 대미 투자에 대해 기업들이 우려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북미회담, APEC 계기 판문점 가능성 거론…‘북핵 용인’ 부담은 걸림돌
현재 북한의 대미 전략은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지렛대로 미국과 수교까지 맺었던 1950~1970년대 중국의 이른바 핑퐁 외교를 답습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핵 보유국 지위를 인정받으면서 지정학적 중요도를 무기로 경제적 이득을 얻겠다는 포석이다.
문제는 냉전 시대 당시 사회주의 진영에서 중국이 차지하던 위상과 잠재력과 비교할 때 지금의 북한은 미국 입장에서 그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북한이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의 완충 지대로만 남는 것은 패권 대결을 펼치는 미국과 중국 모두에 나쁘지 않은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 밀착하는 중국과 러시아 간 균열을 꾀할 카드로 북한을 건들 수는 있겠지만 그 효과가 냉전 시기 소련과 중국 사이를 분열시켰던 전략 만큼 클 리는 없다.
외려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의 최대 매력은 노벨평화상 업적 추가로 보인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기간 때부터 김정은을 만날 수 있다는 발언은 수 차례 반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5일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서 이 대통령을 만났을 때도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상기하며 “(당시 한국은) 북한과 매우 적대적인 관계여서 (올림픽) 표를 팔지 못하고 있었다”며 “아무도 개막식에서 폭파 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억지를 부렸다. 그러면서 “나는 김정은과 관계를 형성해가던 단계였고 로켓맨 같은 위험한 말도 오갔다”며 “그러다가 어느 날 나는 전화를 받았고 만나고 싶다고 해서 대화를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그 통화 직후 한국은 (올림픽) 표를 팔기 시작했고 엄청난 성공으로 끝났다”며 “사람들이 가기를 두려워해 텅 빈 경기장이던 것이 큰 성공으로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은 2018년 2월, 1차 북미정상회담은 그해 6월에 열렸지만 선후 관계를 바꿔 자신의 평화 치적을 스스로 칭송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김정은을 만나 달라는 이 대통령의 요청에 “그것을 추진할 것이고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이후 ‘올해 아니면 내년에 김정은을 볼 것이냐’는 취재진 질문에는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있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올해 그를 만나고 싶다”고 대답했다. 지난 5일에는 미국 해군 정예 특수부대가 2019년 초 김정은의 통신을 도청하는 장치를 설치하려 북한에 침투했었다는 뉴욕타임스(NYT)의 보도도 있었다.
외교가에서는 북미 정상 회동이 이르면 다음달 말 경주 APEC 정상회의나 내년 초 트럼프 대통령의 방중이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특히 2019년 6월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로 김정은에게 판문점 회동을 갑자기 제안한 뒤 이튿날 실제 만난 사례를 들어 APEC 정상회의 기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다만 김정은이 줄곧 비핵화 포기를 대화 조건으로 걸고 있는 점은 부담 요인이다. 이에 대한 아무런 사전 작업 없이 ‘깜짝 쇼’ 방식으로 북미정상회담을 진행할 경우 만남 자체가 자칫 트럼프 대통령이 북핵을 용인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북한식 핑퐁 외교의 성패의 키는 결국 트럼프 대통령의 사익과 공적 외교 전략 사이 어딘가에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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