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영화보다 훨씬 더 참혹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스쿨버스가 햇빛 속으로 나오는 순간 깊은 안도감을 느낀다. 악마의 산불과 맞서 어린 학생들을 지켜낸 스쿨버스 기사 케빈(매튜 매커너히)과 교사 메리(아메리카 페레라)에게 박수가 터져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애플 오리지널 영화 ‘로스트 버스’는 지난 2025년 1월 LA를 재앙의 도시로 만든 ‘악마의 바람’ 이전까지,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기록됐던 북가주 캠프 파이어를 소재로 한다. 이 영화의 탄생에는 제작자 제이미 리 커티스의 운명적인 발견이 결정적이었다. 4년 전 여름 아이다호에 머물던 제이미는 워싱턴 포스트에서 리지 존슨의 책 리뷰를 읽고 케빈과 메리의 이야기를 접했다. 제이미는 당시를 떠올리며 “부엌에서 남편에게 ‘이게 바로 영화야’라고 말했다. 남편이 “뭐?”라고 묻자, 기사를 내밀며 ‘이건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해’라고 확신했다“고 밝혔다.
다음 날 고속도로를 달리던 그는 NPR 라디오 방송 위켄드 에디션을 통해 또다시 같은 이야기를 접했다. 진행자 스콧 사이먼이 “오늘 첫 게스트는 파라다이스의 저자 리지 존슨입니다. 책 전체가 훌륭했지만, 가장 마음을 사로잡은 건 케빈 맥케이와 스쿨버스 이야기였어요”라고 소개한 순간이었다. 차를 길가에 세운 제이미는 곧바로 파트너 제이슨 블럼에게 전화를 걸어 “이 책의 판권을 사고 싶고, 함께 영화를 만들고 싶다. 아마도 영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될 것이”이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제이미는 토론토 영화제 무대에 서서 “믿을 수 없게도 여러분 앞에 서 있다”며 감격을 전했다.
‘로스트 버스’는 다큐멘터리나 전기 영화가 아니다. 실존 인물 케빈 맥케이를 연기한 매튜 매커너히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하지만, 전달력을 높이기 위해 일부는 각색됐다”며 “촬영에 들어가기 전 특별한 책임감과 경외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사건의 정신과 메시지를 온전히 지켜내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허구적 장치를 가미했고, 실존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단순한 재현을 넘어선 진정성 있는 몰입을 완성했다. 특히 이 영화는 감독과 배우가 함께 ‘부자 관계’라는 주제를 중심에 두었다. 매커너히는 “‘아들로서는 너무 늦었고, 아버지로서도 너무 늦었다’라는 대사가 마음 깊이 남았다”며 “폴 그린그래스 감독이 직접 쓴 이 대사야말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두 번째 기회’의 본질을 가장 선명히 드러낸다”고 덧붙였다.
아메리카 페레라는 실존 인물 메리를 연기하기 위해 특별한 준비 과정을 거쳤다. 메리는 약 6시간 동안 이어진 버스 대피 상황에서 자신의 아이들도 위험에 처했음에도 교사로서 학생들의 신체적 안전은 물론 정서적 트라우마까지 살피려 애쓴 인물이다. 페레라는 “메리는 어머니이자 교사로서 감정을 절제해야 했고, 그 희생과 용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녀는 “연기를 하며 끊임없이 ‘얼마나 오래 강한 가면을 쓸 수 있을까? 언제 인간적인 취약함이 드러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말했다. 이를 통해 관객은 영웅적 행동 뒤에 숨겨진 한 인간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영화와 현실의 기묘한 일치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은 “편집을 마친 직후, 올해 1월 LA에서 대형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밝혔다. 산불을 다룬 영화를 완성한 직후 실제로 유사한 재난이 벌어진 것이다. 이는 로스트 버스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한 영화가 아니라,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기후변화와 자연재해의 심각성을 담아낸 작품임을 보여준다. 매년 반복되는 캘리포니아의 산불 속에서, 이 영화는 인간의 용기와 희생을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게 그려내고 있다.
/하은선 골든글로브 재단(GGF)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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