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상자산 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토큰증권의 법제화가 시급하다는 업계 제언이 나왔다. 세계 주요 금융 선진국들이 이미 제도를 정비하며 시장을 확대하고 있는 만큼, 우리나라도 한국만이 가진 ‘K콘텐츠’를 토큰증권 글로벌 경쟁력을 위한 차별화 전략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30일 신범준 토큰증권협의회 회장은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한국거래소 주최로 열린 ‘자본시장 콘퍼런스’에서 “2025년 전 세계 토큰증권 시장은 66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며, 2034년에는 318억 달러에 달할 것”이라며 “국내 시장 역시 2030년에는 약 367조 원에 이르러 코스닥 시가총액의 90% 수준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조속한 법제화와 정책적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 회장은 토큰증권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한국만의 고유 자산으로 ‘K콘텐츠’를 꼽았다. 그는 “토큰증권이 법제화되면 K팝, 웹툰, 드라마, 캐릭터 등을 토큰화한 상품이 많이 출시될 것”이라며 “특정 앨범이나 드라마 같은 프로젝트에 직접 투자할 수 있는 구조도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150조 원 규모(2022년 기준)의 K콘텐츠 시장이 2000~3000억 달러 규모의 토큰 시장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전망이다.
토큰증권의 가장 큰 장점으로는 기존 금융 시스템의 비효율을 해소할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슈롱 리 토크니(Tokeny) 마케팅 총괄은 “비상장 시장에서는 거래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주가 걸리고, 상장 시장도 ‘T+1·T+2 관행’으로 결제에 오랜 시간이 걸린다”며 “기존 금융 시장은 각 시스템의 고립된 ‘사일로’ 문제로 수작업이 많고 비용도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반면 토큰증권은 현금과 자산을 동시에 교환하는 방식으로 즉시 결제(T+0)가 가능하다. 고가의 자산도 소액 단위로 쪼개 투자할 수 있으며, 글로벌 투자자가 24시간 언제든 참여할 수 있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이에 해외 주요 국가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혁신 증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제도권화를 주도하고 있다. 기미오 미카즈키 오사카디지털거래소(ODX) 대표는 “일본은 금융상품거래법 개정 이후 부동산 기반 토큰증권을 발행해 투자자를 대거 유치했다”며 “토큰증권은 부동산 외에도 기업 관련 증권, 항공기·선박·재생에너지 발전소·댐·영화·콘텐츠 IP(지적재산권) 같은 자산군까지 확대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싱가포르와 홍콩 역시 규제 체계를 정비하며 글로벌 투자자 유치에 나서고 있다. 글로벌 시장 규모는 이미 293억 달러에 달하며, 블랙록·골드만삭스·JP모건 등 대형 금융사들도 속속 뛰어들고 있다.
다만 제도화 과정에는 여전히 풀어야 할 과제가 많다. 현금·주식·부동산 등 기초자산이 서로 다른 블록체인에 흩어져 있어 통합된 인프라가 필요하고, 중앙은행의 CBDC 발행 여부와 상업은행의 예금 토큰화 실험도 중요한 변수로 꼽힌다. 퍼블릭 블록체인은 개방성과 글로벌 연결성 측면에서 장점이 크지만 개인정보 보호 한계가 있고, 프라이빗 블록체인은 기밀성을 보장하는 대신 폐쇄성과 중앙화 우려가 따른다. 퍼블릭 체인의 개방성을 살리면서도 규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는 기술적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해법으로 ‘온체인 컴플라이언스’를 주목했다. 영국 자산운용사 파사나라는 45억 달러 규모 자금을 운용하며 머니마켓펀드를 블록체인에 토큰화하고, 국제 표준 ‘ERC-3643’을 적용해 적격 투자자만 참여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24시간 환매와 스테이블코인 기반 즉시 결제가 가능해졌고, 펀드를 현금화하지 않고 담보로 활용할 수 있어 운용 효율도 개선됐다. ERC-3643 표준은 토큰 자체에 규제 규칙을 내장해 지갑 분실 시 소유자를 확인해 복구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다.
신 회장은 “토큰증권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해외 투자자의 접근성과 즉시 결제 시스템인데, 스테이블코인이 그 해답”이라며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이 빨리 마련되면 좋겠지만 시간이 걸릴 수 있어, 우선 테더(USDT) 등 해외 스테이블코인 결제 시스템을 국내 토큰증권 시스템에 도입하는 게 필요해 보인다”고 밝혔다.
한국거래소도 변화하는 시장 흐름에 대응해 장내 신종증권시장 개설 등을 추진 중이다. 정규일 거래소 부이사장은 개회사에서 “내년 초 장내 신종증권시장을 개설할 계획”이라며 “시장 개설 초기에는 부동산, 저작권 등 실물자산을 유동화한 조각투자상품 중심으로 거래가 이뤄질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 “관련 법령 정비를 전제로 비트코인 등 가상자산을 기초로 하는 상장지수펀드(ETF)나 파생상품도 늦지 않게 우리 시장에 상장되도록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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