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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한 방 터뜨리고 사라져라 [허두영의 해적경영학]

허두영 한국과학언론인회 회장

롱벤 헨리 에브리 & 사토시 나카모토

무굴제국 황제의 보물선을 탈취한 롱벤 에브리.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17세기말 무굴제국 황제 에우랑제브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1695년 순례자와 보물을 실은 황제의 호화무역선 ‘간지사와이’가 홍해에서 인도로 가다가 해적들에게 어이없이 약탈당했다. 무역선 이름이 페르시아어로 ‘넘치는 보물’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많은 보물을 싣고 있었을까? 지금으로 치면 일천억 원이 넘는 규모로 보인다.

‘롱벤’(Long Ben) 헨리 에브리는 다른 해적선 5척을 끌어들여 사상최대의 약탈작전을 지휘했다. 동참한 해적선장 토마스 튜가 전투하다 죽으면서 다른 해적선들이 머뭇거렸지만, ‘롱벤’은 해적선 ‘팬시’를 이끌고 거의 단독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불과 100명 남짓한 ‘팬시’의 해적이 보물선을 지키는 해군 500명과 순례자 600명을 제압한 것이다. ‘롱벤’은 이 작전으로 단박에 ‘해적의 왕’으로 불렸다.

영국 해군 항해사 출신 헨리 에브리는 노예선을 타다가 사략선(私掠船)으로 옮겨 탔다. 1694년 ‘찰스 2세’호에서 몇달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자 선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배를 장악한 뒤, 언변이 뛰어난 에브리를 선장으로 추대했다. 꺽다리로 ‘롱벤’이라는 별명은 얻은 그는 배 이름을 ‘팬시’로 바꾸고 무자비한 해적질을 시작했다. ‘롱벤’은 엄격한 규율과 공정한 분배로 해적들의 충성을 끌어내고, 차가운 머리와 치밀한 계산으로 바다를 지배했다.

사상 최대의 해적질에 성공한 롱벤 에브리가 호기롭게 서있는 모습.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격노한 에우랑제브가 온 세계에 수배령을 내리면서 ‘롱벤’은 자주 숨던 마다가스카르 기지를 버리고 카리브해로 향했다. 바하마 제도의 뉴프로비던스로 숨어든 것이다. ‘롱벤’은 해적들에게 약속한 보물을 나눠준 뒤, 자신의 몫을 챙겨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 엑시트에 성공한 것일까? 그가 숨겨놓은 보물이 아직도 카리브해 어딘가 묻혀 있을 것이라는 소문만 남았다. 모든 해적의 로망이랄까, ‘롱벤’은 혜성처럼 나타나 사상최대의 약탈을 저지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롱벤’이 보여준 담대한 리더십은 비트코인을 개발한 사토시 나카모토의 전설적인 궤적과 어울린다. ‘롱벤’이 무굴 제국 황제의 보물선을 털었다면, 나카모토는 중앙은행이 독점하던 화폐 발행권에 정면 도전했다. 2008년 백서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을 발표한 뒤 이듬해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탈중앙 화폐인 비트코인을 창조해서 국가가 보증하는 금융시스템의 뿌리를 흔든 것이다.



해적들의 추대로 선장에 오르고 10대1도 되지 않는 전력으로 황제의 보물선을 제압한 것은 ‘롱벤’이 평소 인정받은 리더십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획과 대담한 실행으로 이룬 성과다. 나카모토는 컴퓨터공학과 암호학에 이어 게임이론까지 완벽에 가까운 블록체인 시스템을 설계하고 실행에 옮겼다. 또 ‘롱벤’이 공적에 따라 전리품을 나눈 것처럼, 엄격한 규칙 아래 채굴한 양만큼 공정하게 보상하여 구성원들이 자발적으로 비트코인에 참여하도록 이끌었다.

부다페스트의 한 공원에 암호화폐 관련 단체가 세운 사토시 나카모토의 흉상.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시작이 담대한 만큼 마무리도 완벽했다. 나카모토는 정체 자체가 신비로운 만큼 엑시트도 전설적이다. 한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는데다, 본명이 맞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3년 남짓 활동하고 짧은 이메일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다른 일로 넘어갔어. 개빈과 모든 사람들에게 맡겼으니 괜찮아”. 그가 보유한 재산은 비트코인만 해도 110만BTC(1,300억 달러, 177조원. 2025년 기준)로, 세계 부호 12위 수준이다.

조무래기 해적은 황제의 보물선을 털겠다는 작전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오합지졸 은행강도도 중앙은행 금고는 쳐다보지도 못한다. ‘롱벤’과 나카모토는 담대한 비전으로 기존 질서의 빈틈을 깨고 들어가 세계 질서를 바꿔 버렸다. 빈틈없는 작전의 열쇠는 공정한 규칙과 두터운 신뢰였고, 완벽한 증발의 비결은 깔끔한 분배였다. 세상을 흔드는 혁신은 담대한 시작과 철저한 설계와 깔끔한 엑시트로 완성되는 걸까?

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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