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랄 다공성 결정물질’ 세계 첫 개발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제 그 걸음 아무렇게나 하지 말세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이 반드시 뒷사람의 길이 되리니」제41회 「이달의 과학자상」(8월)을 수상한 포항공대 김기문(金基文)교수. 그는 항상 위의 선시(禪詩)를 연구실 벽에 붙여 놓고 연구에 임한다.
그가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은 국제적 수준의 과학자가 되라는 것. 이제는 세계 유수학회의 초청을 받아 강연할 정도로 우수한 인재들이 나와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 늘 자신부터 노력하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를 유지한다.
金교수는 90년대 중반, 유학과정에서 배운 무기화학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분야인 초분자화학이라는 새로운 분야로 뛰어들었다. 97년부터 시작된 초분자 연구는 초기부터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맞아 어려움을 겪었다. 경제난국의 상황에서도 그의 팀은 모두 11억원의 적지 않은 연구비를 지원 받았다. 아낌없는 지원에 부응하는 성과를 올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목소리는 낮추고 연구에만 전념했다.연구에 대한 열정과 그를 따라 다니는 새로운 영역에 대한 ‘도전정신’은 「키랄 다공성(多空性)결정물질」 개발이라는 결실을 맺게 했다.
‘키랄 다공성물질’이란 다공성물질안에 빈 공간을 반응물질의 크기, 구조, 화학적 성질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성화되도록 하는 화합물. 金교수는 또 이 물질이 거울상의 하나의 이성질체만을 선택적으로 분리하거나 합성시킬 수 있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의 연구결과는 권위 있는 과학전문지들에 연이어 게재되었다. 지난 4월 27일자로 세계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 중 하나인 『네이처』지에 실린 것을 비롯해, 미국 화학회에서 발간하는 과학잡지 『C&EN』에도 세 번이나 게재됐고 독일의 『앙게반테』지의 속표지로 등장할 만큼 전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김교수는 『네이처』지가 김교수의 논문에 감동을 받았다고 알려오는 순간,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국내 화학연구 결과가 『네이처』지에 실린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
학계는 이 연구가 초분자화학분야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를 해결한 쾌거로 평가하고 있다. 키랄물질의 합성, 분리를 다루는 키로테크놀러지(chirotechnology)에 새로운 가능성을 준 연구성과라는 것이다.
최근 세계 과학계가 유기분자들과 금속을 이용, 다공성 물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유기분자를 이용하면 선택·분리하고자 하는 물질을 예측해 빈 공간의 크기, 구조, 성질 등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도 이 다공성물질의 합성원리가 의약사업이나 정밀화학산업에 폭넓게 사용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분자스위치, 분자기억장치, 센서, 촉매 개발 등은 나노테크놀러지의 기초연구 원리로서 큰 의의가 있다고 높이 평가해 이 상을 수여했다.
30년간 과학에만 열중, 쾌거 이뤄
金교수가 이처럼 4∼5년간의 짧은 연구성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은 연구에 대한 남다른 열정과 노력의 결과로 평가받고 있다.
『장수가 되면 병졸보다 앞에 나서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구에 임했습니다. 매일 새벽 1시까지 연구실을 떠나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의 연구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우리학계도 과학연구사에 남을 획기적인 연구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연구를 독려하고 지원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미흡하다는 점.
그는 열심히 연구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급여와 대우가 제공돼야 하며 서구처럼 우리도 학계에 시장원리가 도입되고 경쟁구조로 바뀌어야 국제무대에 설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특히 과학기술부가 추진하는「창의적 연구 진흥사업」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처럼 위험성은 크지만 가능성 있는 연구팀에 집중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연구성과를 얻어내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金교수는 나노(10억분의 1)미터 크기의 물질, 소자를 만드는 ‘나노테크놀러지’가 21세기의 문명을 바꿔놓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金교수가 연구하고 있는 초분자화학은 모래알 만한 크기에 지금보다 몇만 배 빠른 프로세서나 용량이 큰 메모리칩을 제작할 수 있는 나노테크놀러지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金교수는 앞으로 『초분자화학을 바탕으로 분자스위치, 분자메모리 등 신소재를 이용한 신개념의 컴퓨터 개발에 열정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국내 초분자화학은 아직 걸음마 수준. 그는 이제 세계적인 연구팀들과 겨뤄 앞선 연구결과를 얻어내는 방법은 ‘열심히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80년대 초 유학시절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깨달은 점도, 셀 수 없이 많은 인재 중에 세계 학계에 어깨를 겨룰 만큼의 수준이 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밖에 없다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지난 30년의 세월동안 과학외에는 한눈을 판적이 없는 욕심 많은 과학자 金교수. 그의 귓가에는 아직도 스승의 말이 여전히 맴돈다.
「젊었을 때 밥숟갈 놓으면 공부해야 한다.」
◇ 약력 ◇
54년 서울생
76년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86년 미 스탠포드대학 화학 이학박사
88년 포항공대 화학과 조교수 부임
97년∼현 지능초분자연구단 단장
97년 〈자랑스런 신한국인〉 선정
99년 대한화학회 학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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