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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익사’에서 실낱같은 실마리를 찾다

2002년 5월 어느 날 캘리포니아 고속도로 순찰대 소속 수사관들은 머시드의 베어 강에서 15개월 된 유아의 사체를 발견했다. 사체는 강수면 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엄마인 10대 소녀를 대신해 한 지역 주민이 911에 신고한 뒤, 몇 시간 뒤에 아기는 불쌍하게도 사체로 발견된 것이다. 한편 아기의 엄마인 10대 소녀의 주장에 따르면 자신은 저녁 9시 45분 경 아기와 함께 공원 분수대에 서 있었다고 한다.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나타나 아기가 앉은 유모차를 낚아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그녀는 옆구리가 아플 정도로 전력을 다해 남자의 뒤를 쫓았다고 한다.

그런데 유아 사체에는 뭔가 미심쩍은 점이 있었다. 범죄 병리학자인 제임스 윌커슨 4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날 밤 범죄 현장에 도착했을 때 시체가 여전히 떠 있는 모습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습니다. 익사자를 보면, 살기 위해 마구 몸부림을 치다가 결국 가라앉는 게 보통이거든요”.

부검 뒤 10대 소녀엄마의 의혹은 커져만 갔다. 월커슨은 “아기의 위에는 다른 익사사건에서 늘 보아왔던 것만큼 많은 물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전혀 반항한 흔적이 없었으며, 아주 온순하게 익사한 듯 보였습니다”고 말했다. 그 사이 아기의 엄마는 기자회견을 열어 경찰이 잔인한 살인자를 하루 빨리 잡아 주기 바란다며 눈물을 쏟았다.
윌커슨은 직감에 따라 경찰을 다시 보내 아기를 도둑맞은 현장인 공원분수의 물과 사체가 발견된 강물을 각각 채취하도록 했다.

머시드 경찰은 아기의 위에서 채취한 물이 어느 곳에서 나온 물인지, 아기가 익사한 것이 사실인지, 또 익사했다면 익사 장소는 어디인지 밝혀내기 위해 분수대의 물과 아기의 위에서 채취한 물을 주립 범죄연구소에 함께 보냈다. 하지만 연구원들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윌커슨은 다시 전국 의료조사진 연합인 리스트섭(listserv: 특정주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의 메일링리스트-역주)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모임의 한 가입자는 보울더에 위치한 콜로라도 대학의 식물생태학자 제인 보크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보크는 콜로라도 대학의 생리학자인 데이비드 노리스와 함께 지난 15년간 특이한 전공분야를 연구하고 있었다. 명칭부터 생소한 법식물학이라는 범죄과학에 속한 분야였다. 동물세포(육류 등)는 인간의 산성 위액에 녹아 걸쭉하게 되는 반면 식물세포의 단단한 섬유소 벽은 창자에서도 그대로 보존된다. 사실 고고학자와 고생물학자들도 분석(糞石: 동물 분비물의 화석)에 남은 소화되지 않은 과일과 야채 찌꺼기를 이용해 오래 전부터 선사시대 인간의 음식과 동물의 먹이를 연구하고 있다.

보크와 노리스는 처음으로 강력사건 수사에 동참했다. 그들은 희생자가 마지막으로 먹은 것이 맥도날드의 양파와 피클이 들어간 햄버거가 아니라 야채가 더 많이 들어간 음식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해결의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경찰은 보크와 노리스의 의견을 듣고 근처의 웬디스 샐러드 바를 생각해 냈다. 이 웬디스의 한 여종업원은 아기의 엄마가 저녁식사 뒤 어떤 남자와 같이 나가는 광경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사실 이 사건을 제외하면 보크와 노리스 이전의 법의학은 우회적이기 보다 상대적으로 직접적인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범죄과학의 종사자들은 누구도 인간의 위에서 반쯤 소화된 식물세포의 모양을 굳이 분류하려고 애쓰지 않았다. 식물 행태학 교과서에도 식물세포의 원래 모양이 조금밖에 나와 있지 않으며 양파나 감자 같은 식용야채는 극소수만 보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연구행태 덕분에 보크와 노리스의 연구원들은 사고가 일어난 인근 슈퍼마켓의 농산물코너를 종횡무진 누비며 구한 야채와 과일들을 잘게 씹어 현미경 슬라이드에 하나씩 펴놓고 참고 자료를 만들었다(잘게 씹힌 야채는 위 속에서 발견된 야채와 모양이 매우 흡사하다).

1983년 국립법무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Justice)는 이 두 교수들이 얇은 화보집을 낼 수 있도록 재정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이는 식물학 안내서로서 병리학 분야를 다룬 것이었다. 이 책에는 신비롭고도 아름다운 현미경 사진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날카롭게 모난 돌처럼 보이는 사진은 복숭아 조각과 아메바 같은 기름방울들은 잘게 씹힌 올리브이며 튀어나온 커다란 구멍은 시금치 잎이라고 한다.

보크와 노리스는 한정판인 이 책자를 내면서 미국의 병리학자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릴 때 도움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보크와 노리스의 실험실에는 수많은 소포들이 쏟아 졌다. 부검 시 채집한 위 내용물을 담은 유리병들, 구토물을 뒤집어 쓴 옷이나 침구류 조각들을 연구해 달라는 우편물이 끝도 없이 배달되었다.



다시 머시드 유아살인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만일 윌커슨이 보크에게 익사한 유아의 위에서 채취한 야채 대신 물을 분석해 달라고 요청했다면 사건은 오리무중에 빠졌을까? 보크는 “우리는 물에서도 뭔가를 알아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즉각 알아차렸지요”. 라고 말한다. 식물이 땅에 퍼지듯이 조류도 수생환경에서 번성한다. 이 식물과 유사한 그룹으로서 우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친숙한 조류로는 미역이나 다시마를 꼽을 수 있다. 심지어 돌말로 알려진 생기 없는 단세포 조류는 더욱 자주 눈에 띈다.

보크는 물 샘플들을 현미경 밑에 놓고 촬영했다. 각 방울은 수십 개의 돌말 종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각 돌말에는 보석 같은 모양으로 복잡하게 꾸며진 세포벽이 있었다. 복은 유아의 위에서 분수와 강물 모두가 나왔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보크의 발견을 토대로 이런 추리가 가능해졌다. ‘누군가 아기를 분수에 넣었다가 아기가 죽었거나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강에 던졌다’고 말이다. 경찰이 위의 증거들을 10대 소녀인 아기엄마에게 들이대자 소녀는 모든 사실을 실토했다.

보크와 노리스의 성공담이 소문날수록 그들에게는 상담건수만이 늘어날 뿐이다. 그런데 위(胃) 내용물의 분석은 식물학이 이용되는 법의학 분야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비록 미국에서 법식물학은 여전히 희귀한 분야지만 이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의 활약상은 대단하다. 그들은 식물이 잘 자라지 못한다는 표시를 알아채고는 숨겨진 시체를 찾는다. 또 사진의 배경으로 비친 나뭇잎을 추적해 유괴 당한 어린이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아낸다. 증거인 식물조각을 이용해 용의자를 범죄현장에 세우며 유골 사이로 자란 잡초의 수명을 판단해 사망추정시간까지 알아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범죄수사관은 식물학을 수사에 이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에 대해 보크는 “안타깝다”면서 “모든 법의학 연구실에 식물학적 증거를 알아보도록 기본 훈련을 받은 연구원들이 상주해야 합니다. 어쨌든 이런 연구는 비용이 안 들어가고 손쉬운데다가 대부분의 경우 그저 평범한 광학현미경만 구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단순한 요구조건이 갖춰지지 않은 이유는 법식물학에는 뛰어난 기술이 필요 없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컴퓨터 분석과 DNA 지문이 각광받는 시대니 말이다. 벌레에 집중하는 법곤충학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에게 유리한 요소를 갖고 있다. CSI 범죄드라마에서 구역질나는 장면이 많을수록 구더기를 증거로 이용하자는 의견에 힘이 실어지기 때문이다. 한편 법률전문방송인 코트 TV는 최근 보크가 사건을 해결하면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일을 드라마로 만들자는 제의를 그녀에게 했다. 또 보크와 노리스는 그들의 분야에서는 최초로 지침서인 법식물학(Forensic Botany)의 초반부 집필을 마쳤다.

위의 이야기를 국립법무연구소에서는 매 끼마다 야채를 먹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채식을 하게 된 사람들은 장수하게 되고, 그렇지 않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은 최소한 부검 시 위 속의 야채를 통해 살인자를 밝혀낼지 누가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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