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제공 :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과학과 기술
최근 복잡계(Complex System) 이론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복잡계 이론이란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질서가 몇 개의 이론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불가사이한 복잡성으로 얽혀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수많은 변수가 유기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1 대(對) 1 방식의 기계론적 해석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많은 수의 요소들이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 복잡계의 예를 들면 우선 많은 입자들이 물리적인 상호작용을 하는 통계물리학 및 고체물리학의 물리계를 들 수 있다.
또한 생화학적인 작용이 다양하고 복잡하게 일어나는 생물세포, 많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인간사회, 그리고 많은 회사의 주식이 거래되는 증권시장도 복잡계의 대표적 사례다.
특히 통계물리학은 100여년의 역사를 통해 여러 가지 입자들로 이루어진 복잡한 물리계를 연구하는 다양한 개념과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이 같은 통계물리학의 정량적 방법들을 다른 학문 분야에 적용시키려는 시도들이 최근 들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경제물리학 또는 사회물리학이라고도 부른다.
우리나라의 성씨 분포에 대한 연구도 이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즉 통계물리학의 연구 방법을 사회문제에 적용한 것이다.
■ 우리나라의 독특한 성씨 분포
성씨의 분포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방법이 많이 쓰인다. 우선 각 성씨를 집단의 크기 순서로 나열한다. 그렇게 한 뒤 순위를 수평축에, 그리고 성씨 집단의 크기를 수직축에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순위가 뒤로 밀릴수록 성씨 집단의 크기가 지수함수의 꼴로 감소한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멱함수의 형태로 감소한다.
지수함수와 멱함수는 성질이 아주 다르다. 지수함수의 형태로 감소하는 성씨 분포의 경우 순위가 낮아짐에 따라 낮은 순위의 성씨를 갖는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반면 멱함수의 형태로 감소하는 성씨 분포의 경우에는 순위가 낮은 성씨를 갖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다.
최근 많이 회자되고 있는 ‘롱테일 경제학’의 개념도 많은 분포가 지수함수의 꼴을 따른다는 것에 근거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소득분포는 지수함수의 꼴을 따르는 반면 사람들의 키는 멱함수 꼴의 분포를 갖는다. 이런 이유 때문에 소득이 보통사람의 몇 천 배가 되는 사람은 있어도 키가 보통 사람의 두 배인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는 한 페이지 안에 적을 수 있을 정도인 300개 정도지만 일본의 성씨는 13만2,000개나 된다. 이는 두 나라 성씨 분포의 꼴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씨 분포와 더불어 흥미 있는 것은 집단의 크기가 주어져 있을 때 그 안에 몇 개의 성씨가 발견되는가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00만 명의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성씨의 수는 1만 명의 사람들 속에서 발견되는 성씨의 수보다 분명히 클 것이다. 이 경우 사람의 수가 증가할 때 성씨의 수가 어떤 함수의 꼴로 증가하는지 살펴보자.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크기의 성씨 집단을 조사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는 화성, 오산, 그리고 성남의 전화번호부와 대학교의 수강신청 정보를 이용한 학생들의 리스트를 활용했다.
이 자료들로부터 얻은 결론은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그 안에서 발견되는 성씨의 수가 로그함수의 꼴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는 멱함수의 꼴로 증가하는 일본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이 아주 많이 모여도 그 안에서 새로 발견되는 성씨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반면 다른 나라에서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모일수록 새로운 성씨를 갖은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는 얘기다.
■ 작은 성씨의 인구증가율 높아
성씨가 처음 인류사회에 등장했을 때의 상황은 아마도 큰 성씨 집단의 인구증가율이 작은 성씨 집단의 인구증가율보다 컸을 것이다. 왜냐하면 규모가 큰 씨족 집단일수록 수리시설의 건설, 대규모의 군대 양성 등에 있어서 훨씬 유리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이라면 큰 성씨 집단의 인구증가율이 평균 인구증가율보다 클 것으로 기대된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는 규모가 작은 성씨 집단이라고 해서 굳이 인구증가율이 작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큰 성씨 집단이나 작은 성씨 집단 모두 인구증가율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하지만 1985년과 2000년 사이의 15년 동안 각 성씨 집단의 크기를 비교해 본 결과 아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작은 성씨 집단의 인구증가율이 큰 성씨 집단의 인구증가율보다 상당히 높았던 것.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000명 이하의 작은 성씨 집단 인구증가율은 상당히 컸으며, 특히 성씨집단의 크기가 1,000명에서 점점 작아질수록 인구증가율은 반비례하는 경향을 보였다.
사례를 보자. 지난 1985년에는 단 한명 밖에 없었던 어떤 성씨는 15년 후에 무려 462명이나 됐다. 이 같은 인구증가는 결코 생물학적인 요인, 즉 결혼을 통해 자식을 낳는 것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반면 1만 명 이상의 큰 성씨 집단 인구증가율은 평균 인구증가율과 거의 같았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1985년에서 2000년까지 15년 동안 0.1377의 인구증가율을 보였다. 이는 성씨 집단의 크기가 1만 명을 넘어서면 자신들의 성씨 집단이 작다는 의식을 갖지 않게 돼서 비 생물학적 노력을 하지 않게 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 지난 1985년 우리나라의 본관 수는 3,359개였는데, 2000년에는 4,188개로 늘었다.
특히 통계청의 자료를 살펴본 결과 그 기간 중 없어진 본관은 두세 개도 되지 않았다.
이처럼 15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중에 없어진 본관이 거의 없다는 것은 성씨 집단이 작을수록 자신의 성씨가 없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앞에서 관찰한 사실, 즉 작은 성씨 집단일수록 인구증가율이 크다는 것과도 부합한다.
■ 15년간 우리나라 성씨 11개 증가
통계물리학의 으뜸방정식을 이용해서 지구상의 여러 나라 성씨 분포를 살펴보면 대략 2가지 유형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처럼 자신의 성씨를 새로운 성씨로 바꾸는 일이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지 않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가 완전히 다른 성씨 분포를 갖는다는 것이다. 실제 이 같은 현격한 차이로 말미암아 지구상 여러 나라들의 성씨 분포는 두 개의 그룹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과거 우리나라의 성씨 분포는 어땠을까. 이를 알기 위해 10개의 족보자료를 이용했다. 족보에는 부계의 가계도는 물론 그 집안에 시집온 여자들의 성씨와 본관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다. 따라서 이를 이용하면 과거 500년 동안 성씨의 분포가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알 수 있다.
당초에는 소위 ‘뼈대 있는 집안’의 경우 배우자를 다른 유력한 집안에서 택할 것이므로 배우자의 성씨 분포가 그리 다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막상 분석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나타났다.
예를 들어 김해 김 씨의 경우 10만 명 정도의 배우자 성씨가 165개나 됐고, 본관까지 고려하면 거의 3,000개 정도의 집안과 500년 동안 혼인을 했다. 또한 배우자 성씨 분포가 10개의 족보 간에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는 점도 나타났다. 이는 개개 집안들이 배우자를 택할 때 집안에 따른 특정한 선호도는 없었음을 의미한다.
글_김범준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beomjun@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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