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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O&스토리] 정성욱 금성백조 회장..."장인정신 깃든 아파트 위해 … ‘천천히, 그러나 제대로’ 소신 지킬 것”





“프로젝트마다 작품을 만든다는 장신정신을 담아 아파트를 짓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정성욱(사진) 금성백조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장인정신’이다. 그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다른 소비재와 달리 아파트는 사람이 거주하는 만큼 가치를 담아 지어야 한다고 믿는다. 지난 1981년 직원 네 명과 함께 시작한 금성백조가 2016년 현재 시공능력평가 60위(시공능력평가액 4,394억원)까지 오를 수 있었던 데는 ‘천천히 그러나 제대로’ 짓겠다는 정 회장만의 장인정신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 無 수저로 시작한 어린 시절

초등졸업 후 가구공장에 취직

건설업으로 옮기며 독학 매진

35세때 창업하며 새 도전 시작

정 회장은 자신의 유년·청년시절을 ‘무(無)수저’였다고 회고한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태어나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밑에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인물이 딱 한 명뿐이었던 동네에서 정 회장 역시 초등학교 이후 교육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짚으로 농기구를 만드는 등 뛰어난 손재주를 가진 덕에 10대 때 가구공장에 취업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기술을 잘 배워야 한다는 어른들 말씀만 듣고 눈밖에 나지 않으려 심부름을 열심히 했다”며 “가구 설계와 제작도 배워 밤낮없이 일했다”고 전했다.

당시 경험은 정 회장에게 현재까지도 소중한 재산으로 남아 있다. 사촌누이에게 결혼선물로 만들어준 가구부터 절 같은 목재 건축까지 자유자재로 설계·제작 가능한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아파트를 분양할 때도 내부에 들어가는 가구 하나하나에 관심을 쏟아 이쪽 부분을 담당하는 팀이 몇 배나 더 힘들어하는 것으로 안다”며 “평생의 직업병이자 자부심이어서 직원들에게 작은 것까지 더 많이 가르쳐주고 싶다”고 밝혔다.

목공 분야에서 성실하고 재능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던 청년 정성욱은 가구공장장의 소개로 건설 쪽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건설업과 인연을 맺었다. 건설업계에서도 낮에는 실무를 익히고 밤에는 건설업 관련 공부를 하며 밤낮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일본어로 적힌 건축공학과 구조공학 서적을 받아 일본어 공부를 해가며 독학했다. 그는 “배우고 싶은 욕망이 강해 단 한마디도 놓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뒤 건설회사에서 3~4년간 경험해야 알 수 있는 내용을 실전과 독학으로 모두 알았다고 자부할 만한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후 그의 나이 35세 때 금성백조를 만들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2년 만에 오간 천당과 지옥

품질만 믿고 분양했지만 ‘참패’

직접 마이크 들고 아파트 팔기도

영업·마케팅력 강화하며 재도약

회사를 창립한 뒤 주택사업을 중심으로 조금씩 성장했지만 5년 만에 큰 위기를 맞았다. 1986년 대전 대덕구 비래동에 지은 금성백조 아파트 100가구의 준공 시점이 다가올 때까지 단 3가구밖에 팔지 못한 것이다. 아파트 품질만 좋으면 분양이 잘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판단착오였다. 분양 실패로 직원들과 협력사까지 모두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됐다.

정 회장은 당시를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내 탓이었기 때문에 좌절감이 더욱 컸다”고 표현했다. 이에 따라 사업 성공을 위해 트럭에 홍보전단을 싣고 다니며 직접 마이크를 들고 아파트를 팔았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전단지를 돌릴 때마다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가 “안 해 본 일이 없었다”고 했을 정도로 모든 직원이 노력해 미분양을 털어내고 회사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정 회장은 “비래동 금성백조 아파트는 품질에 더해 영업과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오답노트’ 같은 프로젝트”라고 설명했다.



큰 위기가 회사를 휩쓸고 지나간 뒤 1988년 대전 중구 중촌동 금성백조 아파트는 앞선 프로젝트와 정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182가구를 분양한 결과 147대1의 청약경쟁률을 기록하며 성공을 거둔 것이다. 프로젝트 매출 총액이 약 57억원에 달했으며 분양을 희망하는 신청금만도 200억원 가까이 들어왔다. 대전에 있는 현금은 금성백조가 다 가져갔다는 소문이 돌 정도의 성공이었다.

그는 “2년 전 비래동 프로젝트의 위기와 비교해보면 지옥과 천당을 오간 셈”이라며 “비래동의 위기가 없었으면 중촌동의 성공도 없었고 지금의 금성백조도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기와 성공의 순간을 경험하며 사업은 수십, 수백 가지 요소들이 결합돼 성패가 결정된다는 점을 깨달았다. 정 회장은 중장기 전략을 세울 때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 생기지 않도록 매일 아침 새벽4시부터 신문을 8개씩 챙겨 읽는다. 그는 “국내와 교류하는 곳들의 정치·경제·사회를 알아야 중장기적 전략을 수립할 수 있다”며 “밥은 굶어도 신문은 읽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내실 갖춘 장수기업 목표

외형보다 우량 사업지 공급 우선

임대주택·정비사업으로 다각화

직원 개개인 전문가 되게끔 지원



금성백조의 올해 수주 목표액은 1조원이다. 무리하게 규모를 확대하기보다 우량 사업지를 공급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몇 년간 공급이 없었던 지역이나 주거 선호도가 높은 곳 위주로 사업용지를 확보하고 임대주택·정비사업 등으로 주택시장을 다각화하는 계획을 세웠다.

정 회장이 생각하는 금성백조의 진정한 목표는 숫자로 대변되는 양보다 가치가 담긴 질을 높이는 것이다. 그는 “외형적으로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 보면 시장 변화와 고객 욕구 등을 만족시키기 힘들어진다”며 “확장보다는 내실을 키우는 것이 진정 큰 성공을 이루는 길”이라고 밝혔다.

외형적 성장에 치우치다 보니 장수기업을 배출하지 못한 국내 현실에도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정 회장은 “일본의 경우 몇백 년 이어진 기업들이 핵심 노하우를 전승하지만 국내는 형식적인 것만 전달될 뿐 핵심은 모두 끊겨버린다”고 아쉬워했다.

직원교육에 대한 중요성도 강조했다. 정 회장은 “기업을 이끌면서 시간이 갈수록 사람을 뽑고 교육시키는 부분을 많이 고민하게 된다”며 “직원 개개인이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도록 최대한 많이 지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시절을 헤쳐가며 현재까지 살아온 인생 선배로서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실패하고 부딪혀도 그 자체로 값지고 아름다운 때인데 지금 대학은 취업을 위한 과정에 불과한 것 같다”며 “사회문화적으로 많이 즐기고 놀고 배웠으면 한다”고 답했다. 또 “나중에 입사해서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며 “스트레스 관리와 개인적 경쟁력, 컨디션을 유지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전= 권경원기자 nahere@sedaily.com 사진=권욱기자

■정성욱 회장은

△1946년 대전 △충남대 경영학 명예박사, 한밭대 명예공학박사 △제15~17대 대전상공회의소 의원 △제18~21대 대전상공회의소 상임의원 △제3~5대 대한주택건설협회 대전충남도회 회장 △제8대 대전광역시개발위원회 회장 △제21~22대 대전상공회의소 부회장 △제8~9대 대한건설협회대전광역시회 회장 △금성백조 대표이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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