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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통해 세상읽기] 분균인야(分均仁也)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훔친 재물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이 도둑의 인이다





헌법재판소는 7월15일부터 8월15일까지 한 달간 온오프라인에서 총 6,552명을 대상으로 우리 사회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가 잘 지켜지느냐를 묻는 설문에 81%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고 19%만이 그렇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81%는 전혀 그렇지 않다가 22.8%이고 별로 그렇지 않다가 58.2%로 나뉘는 반면 19%는 매우 그렇다가 2.9%이고 대체로 그렇다가 16.1%로 나뉘었다. 아마 ‘갑질’ 논란, 일당 400만원의 ‘황제 노역’, 재산 형성 과정이 투명하지 않으면서도 모르쇠로 일관하는 청문회 등을 보면 이 결과가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법 앞에 불평등한 원인으로는 사회지도층의 특권의식이 23.2%로 가장 많고, 그 뒤로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 문제가 20.8%, 원칙 없는 법 집행 16.4%, 물질만능주의 풍토 15.4%, 연고주의 만연 12.9% 등으로 거론됐다.



현대사회가 법치사회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국민 10명 중 8명이 “국민이 법 앞에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이것만큼 중요한 문제도 없다. ‘유전무죄’나 ‘유권무죄’라는 말처럼 법치가 자리 잡지 못하면 기회의 공정성이 무너지고 공정성이 무너지면 변화와 창의를 향한 도전이 살아나지 못하고 도전이 살아나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정체의 늪에 빠져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아무리 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도덕의 가치를 역설한다고 해도 법과 도덕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을 규제할 수 없게 된다. ‘헬조선’을 비롯해 우리 자신의 처지를 자조하는 어휘들은 찬반을 넘어서 법이 있지만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도덕이 있지만 아무런 빛을 발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예사로운 현상이 아니다.

장자는 ‘헬조선’과 같은 자조적인 언어를 만들지 않았지만 도덕이 사회를 규제하지 못하고 오히려 역설적으로 기득권의 이권을 옹호하는 수단으로 전락한 상황을 비판한 적이 있다. 궤짝을 뜯어 훔친다는 ‘거협’편을 보면 작은 도둑과 큰 도둑 이야기가 나온다. 작은 도둑은 상자에 열쇠를 채우고 노끈으로 묶어두면 물건을 훔칠 생각을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반면 큰 도둑은 상자나 궤짝을 통째로 들고 가버리니 열쇠를 채우고 노끈으로 묶은 것은 잘 훔치도록 도와준 셈이다. 공자가 살았을 적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도척은 큰 도둑이 그들만의 도(道)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방이나 금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맞히는 것이 성(聖)이고, 남보다 먼저 훔치려 들어가는 것은 용(勇)이고, 훔치고 남보다 뒤에 빠져나오는 것이 의(義)이고, 훔칠 수 있는지 아는 것이 지(知)이고, 훔쳐서 골고루 나누는 것이 인(仁)이다(분균인야·分均仁也). 이 다섯 가지를 다 갖추지 않고서 대도(大盜)가 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여기서 분균을 인으로 풀이하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분균은 골고루 나눈다는 뜻이지만 실제로 끼리끼리 나눠 먹는다는 뜻일 뿐이다.



좀도둑과 대도는 어떻게 다를까. 좀도둑은 개인의 실력에 의존하지만 대도는 여러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 물건을 훔칠 수가 없다. 이때 위험을 피하기만 하고 이익을 독차지하려고 하면 대도는 생겨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도척은 대도의 요건을 통해 오늘날 우리 사회가 불평등한 원인으로 들고 있는 특권 의식, 구조적 문제, 연고주의 등을 다른 말로 표현하고 있다. 어디에 가면 이권에 개입할 수 있는지 알고 서로서로 뒤를 봐주며 이익을 공유하므로 법이 있지만 법치가 상식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도덕이 있지만 제 힘을 펼치지 못하는 것이다. ‘거협’편에 나오는 대도 이야기는 그냥 상상력으로 꾸며낸 이야기로 볼 수 있지만 현실과 닮은 점이 많다는 점에서 다소 섬뜩한 느낌을 갖게 한다. ‘대도’ 이야기를 허구의 소설처럼 편하게 읽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면 너무 순진할 것일까. 신정근 성균관대 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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