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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만의 '희망봉'





1497년11월22일 정오 무렵, 아프리카 대륙 남쪽 바다.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이끄는 4척의 포르투갈 선단이 해역을 지났다. 선단은 기쁨에 젖었다. 아프리카 최남단으로 알려진 폭풍의 곶(Cape of Storms)를 통과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도까지 가는 길에 희망이 생겼으니 기쁠 수 밖에. 정작 아프리카 최남단은 남동쪽으로 170㎞ 떨어진 아굴라스곶(Cape Agulhas)이었으나 선단은 이듬해 5월 인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 선단이 출항에서 아프리카 남단 도달까지 걸린 시간은 약 7개월. 당시에는 첨단 선박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선 3척과 카라벨선 1척, 선원 178명으로 구성된 선단은 무수한 난관을 겪었다. 리스본을 출발해 거의 브라질 부근까지 도달할 정도로 대서양을 크게 돌았다. 항해 거리 약 1만 ㎞. 어떤 유럽인보다도 긴 항해를 겪은 이유는 포르투갈 항해자들이 남긴 항해 일지 때문이다.

바스코 다 가마의 선단은 무엇보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의 경험에 따랐다. 바르톨로메우 디아스는 가마의 선단보다 9년 앞서 아프리카 남단까지 항해했던 인물. 선원들의 반대로 인도로 항해하겠다는 뜻을 굽혔으나 대서양을 크게 우회해야 안전하다는 경험을 일지로 남겼다. 적도 인근에 이르면 바다가 펄펄 끓어 배를 태운다는 두려움도 항로에 영향을 미쳤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인식이 깨진 것은 이 뿐 아니다. 아프리카 대륙 남단에는 또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 존재해 바다로는 인도까지 항해할 수 없다는 오래된 믿음도 없어졌다.(지구 전체가 하나의 원시대륙이었다는 판게아(Pangaea)이론에 따르면 고대인들의 믿음이 틀린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대목은 바스코 다 가마의 항해가 몰고 온 경제적 파장. 탐험과 대항해시대가 활짝 열렸다. 당시 유럽인들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1492)보다 포르투갈의 인도 항로 발견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돈이 됐기 때문이다. 콜럼버스의 뒤를 이은 스페인 탐험대는 소문만 요란했을 뿐 금과 은을 풍부하게 가져오지 못한 반면 포르투갈 선단은 달랐다.

선원 30여명이 달랑 배 두 척만 건사한 채 출항 26개월 만에 귀항한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의 향신료와 함께 돌아왔다. 출항 당시부터 인도인들의 환심을 살만한 물품을 충분히 적재하지 못해 향신료를 적게 받아왔다지만 출자자들은 투자금의 60배 넘는 배당을 받았다.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는 인도 항로의 길목인 폭풍의 곶을 희망의 곶(Cape of Good Hope), 희망봉이라고 바꿔 불렀다.



후추를 비롯한 동양의 향신료가 같은 무게의 금 가격과 맞먹거나 그 이상이던 다는 시절, 인도 항로 개통은 유럽사에 신기원을 열었다. 무엇보다 동서 직교역이 크게 늘어났다. 1453년 비잔틴제국을 몰락시키며 유럽과 아시아의 길목을 막아버린 오스만 투르크에 비싼 통행세와 관세를 물지 않고도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과 인도의 향신료, 면제품을 마음껏 들여왔다. 포르투갈의 성공에 자극받은 프랑스와 영국의 탐험가들도 적극적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포르투갈의 횡재는 인도 항로 개척으로 끝나지 않았다. 브라질 발견이라는 덤까지 생겼다. 한껏 고무된 포르투갈이 바스코 다 가마 선단의 귀환 6개월 만에 인도에 보낸 대규모 선단이 또 다시 대서양을 크게 돌면서 브라질을 찾아냈다. 마젤란의 세계 일주와 대서양-태평양 항로의 발견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 항로 개척에 자극받았다. 포르투갈 태생이나 스페인에서 일했던 마젤란은 포르투갈이 장악한 인도 항로와 반대 방향으로 계속 항진하면 인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아래 서진을 계속한 결과, 마젤란 해협을 통해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안전하게 연결되는 항로를 찾았다.

바스코 다 가마의 탐험 100년 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동인도회사’를 설립할 만큼 인도 항로는 선박으로 붐볐다. 대거 유입된 진귀한 동양 물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은(銀)과 더불어 상품의 수요 공급에 혁명적인 변화를 낳았다. 상품의 가격이 뛰는 물가 혁명으로 상인들의 이윤 추구 동기가 강해지고 산업혁명의 싹이 텄다. 바스코 다 가마의 신항로 개척은 말 그대로 유럽의 희망을 향한 전환점이었던 셈이다.

동양에도 희망을 남겼을까. 그렇지 않다. 유럽이 주도한 ‘대항해 시대’ 이후 아시아에는 마음씨 좋은 선교사가 들어와 실과 바늘, 망원경 같이 값싸고 질 좋은 유럽 상품을 퍼트렸다. 경계심을 허물어진 자리에는 아편 따위의 마약에 이어 종국에는 총과 칼, 대포가 들이닥쳤다. 아시아, 아프리카는 식민지로 전락하고 세계사의 주류는 유럽으로 넘어갔다. 유럽인들이 바라본 ‘희망’은 제국주의 수탈을 알리는 ‘폭풍’이었다./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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