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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년전, 최초의 유조선 와트호





1861년 1월9일, 영국 런던항. 엘리자베스 와트(Elizabeth Watts)호가 닻을 내렸다. 미국 필라델피아 항구를 출발해 대서양을 건너 51일 만에 도착한 이 배에는 특별한 화물이 실려 있었다. 1,329갤런의 등유. 국제 거래 단위인 배럴로 환산하면 31.7 배럴에 못 미쳤다. 서해 바닷가를 오염시킨 태안 유조선이 7만여배럴, 30만톤급 유조선이 176만배럴을 운송하는 오늘날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이지만 엘리자베스 와트호의 항해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바다와 배를 통한 유류 운송 자체가 처음이었다.

‘최초의 유조선’이라고 하지만 엘리자베스 와트호는 224t짜리 범선으로 당시 기준으로도 주목할만한 선박은 아니었다. 천재 공학자 이점바드 부르넬이 설계해 1845년 건조된 증기범선 크레이트 브리튼호는 3,674t 크기에 시속 11노트를 자랑했다. 1847년 건조된 범선인 이 배가 최초의 유조선으로 이름을 올린 이유는 돈 때문. 대형 화물선은 등유가 안전하지 않다며 적재를 거부하거나 보통화물의 5~10배에 이르는 운임을 요구했다. 와트호는 운임이 낮은 선박을 고르고 고른 끝에 선택받았다. 막상 보통 화물보다 3배 많은 운송료를 받기로 한 엘리자베스 와트호의 출항은 예정보다 늦어졌다. 선원들이 도망쳐 인력을 모으는데 시간이 지체된 탓이다.

임금을 더 주기로 약속하고 뽑은 선원들 역시 화물 근처에는 가지 않았다고 한다. 폭발을 두려워해서다. 원유나 등유를 적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던 시절, 와트호는 등유를 158ℓ맥주통에 담아 실어 날랐다. 미국 최초의 석유 수출도 이때부터다. 새로운 수요를 찾아내는 게 석유업계의 당면 과제이던 시절, 미국은 운임에서 손해가 나더라도 어떻게든 판로를 뚫으려 애썼다. 독립전쟁의 앙금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던 시절, 영국 배에 등유를 실려 보낼 만큼 미국은 새로 개발되는 유전의 판로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

1859년 에드윈 드레이크가 사상 처음으로 ‘땅을 파서 원유를 캐낸’ 이후(이전까지 기름이란 바위틈에서 나오는 것으로 믿었다. 石油라는 말 자체가 바위에서 솟는 기름이라는 뜻이다. 영어의 rock oil도 마찬가지다) 인근 지역의 유정은 1년 새 1,000개 넘게 불어났다. 자연스레 생산 증가가 뒤따랐다. 문제는 수요가 제자리였다는 점. 석유업자들은 원유에서 등유만 분리해 판매하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는 게 다반사였다. 고급 고래 향유나 중저가 식물성 기름을 대신할 조명용으로 등유를 추출해 쓴 나머지는 개울이나 강가에 버렸다. 중유나 아스팔트의 성분과 용도에 대해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원유의 활용이 휘발유 등으로 넓어지면서 유조선도 전성기를 향해 내달렸다. 다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남북전쟁으로 내수와 수출 위축을 겪은 미국의 민간업자들은 종전 후 더욱 적극적으로 판매 증대에 나섰다. 전쟁이 끝나고 유정을 발견해 한 몫 잡으려는 제대군인들도 넘쳐났다. 유전이 속속 발견되는 가운데 1869년에는 엘리자베스 와트호를 훨씬 뛰어넘는 유조선이 나왔다. 1869년 건조된 찰스호는 기름을 오크통에 싣지 않고 용량 13톤짜리 철제 사각형 용기 59개에 담았다. ‘최초의 유조선’은 와트호가 아니라 찰스호라고 간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별도의 기름 탱크를 갖춘 ‘본격적인 유조선’의 등장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린다. 노벨상을 제정한 알프레드 노벨이 러시아산 석유를 운송하기 위해 친형과 합작으로 1878년 건조한 조로아스터호,1886년 선보인 독일의 글뤼카우프호, 영국 셸사의 뮤렉스호(1892년)가 저마다 원조라고 주장한다.

분명한 사실은 하나다. 어떤 배가 본격적인 유조선이든 상업용으로 운임을 받고 석유를 날랐던 최초의 선박은 와트호라는 점이다. 147년 전 작은 목조범선으로 소량의 기름을 운반했던 사람들의 발상과 도전이 오늘날 거대 유조선 시대로 이어진 것이다. 현대 유조선의 대부분은 이중 격벽 등 안전장치를 갖춰 예전보다 사고가 급감했다고 한다. 성능이 좋아진 대형유조선의 70%는 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진 배들이다. 세계를 항해하는 대형 유조선 4,024척 가운데 2,822척이 한국과 일본, 중국에서 건조됐다.

문제는 내용이다. 갈수록 한국이 힘이 빠지는 형국이다. 중국에 추월 당한 데 이어 일본에도 수주잔량에서 밀렸다. 조선 수주 잔량에서 일본에 뒤지기는 무려 17년 만이다. 외교에서는 시한 폭탄만 잔뜩 심었고 경제는 낙제점수 일색이다. 도대체 이 정부가 지난 4년간 뭘 했는지…. 새로운 도전과 각오가 필요한 때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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