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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미국인이 살아가는 방법

세상의 모든 물건을 만들어 내는 도시, 그러나 이 도시는 실리콘과 플라스틱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도 만들고 있다. 선전은 새로운 국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다.





‘프랭키스’에 가보았는가? 중국에 있는 미국이다. 바니시가 칠해진 매대가 가게 내부를 가로지르고, 오크 나무로 만들어진 팻말이 뒤편의 흡연실을 가리키고 있다. 벽돌 벽에는 맥주회사 로고들과, 액자에는 추억을 자아내는 사진들이 잔뜩 붙어 있다. 20대들이 닭날개를 먹으며 키가 큰 테이블 사이를 어슬렁거린다. 다른 많은 술집에서도 보았듯 사내가 빈 의자들 사이에 앉아 있다. 카운터 아래의 못에 코트를 걸고, 와인 한 잔을 가져다 놓고 양초를 바라보고 있다. 어둑한 천정의 조명이 칠판에 써진 맥주 목록을 비추고 있다. 10여 종류의 술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중에는 ‘기네스’도 있었고, 캔사스 시티에서 만든 ‘탱크 7 팜하우스 에일’도 있다. ‘탱크 7 팜하우스 에일’은 독하다. 도수가 8.5도나 되기 때문에 1~1.5 리터 이상 마시면 바텐더도 주의를 줄 것이다. 그러나 ‘프랭키스’에서 자랑하는 치즈버거와 함께 먹으면 괜찮다. 손으로 빚은 거대한 패티가 건강에 좋은 치즈 덩어리 위에 얹혀져, 빵 사이에 끼워져 나온다.

전문적으로 요리를 평가하는 어떤 매체에 따르면 “이 도시 최고의 버거다! 지방과 고기의 비율이 최적이다!” 치즈버거가 아닌, 이 가게 특유의 분위기에 초점을 맞춘 리뷰도 있다. “내가 그리워하던 남부식 분위기.” “프랭키스에 오면 고향에 온 것 같다.” 여기서 고향은 미국을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함정이 하나 있다. 프라이드 치킨 냄새 물씬 나는 이 미국 남부식 가게는 다름 아닌 중국의 선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가게는 선전에 거주하는 외국인 사회의 명실상부한 중심지에 있다.

프랭키스는 조시 비스마노브스키 같은 이들의 단골집이기도 하다. 비스마노브스키는 샌 프란시스코 베이 에이리어의 토박이다. 그는 화면 속 알프스 시냇가에다가 전선으로 연결된 플라스틱제 게임용 산탄총을 이리저리 겨누고 있었다. 그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수북한 갈색 곱슬머리가 출렁거렸다.

그는 플라스틱 총열덮개를 제치고 총을 쐈다. 그의 총탄은 명중했다. 그러나 쏴서는 안 되는 동물에게 맞았다. 팝업 식 대화상자에 경고 메시지가 떴다. “소를 쏘면 안 됩니다!” 게임은 그렇게 끝이 났다.

게임이 끝난 그는 맥주잔을 비우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 밤 공기는 따뜻했고, 태풍이 몰고 온 폭우가 도시를 3일째 물청소하고 있었다. 프랭키스 앞에는 유리로 된 차양이 있었다. 그래서 그 아래 있으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수입산 일제 담배를 꺼내는 비스마노브스키의 시선은 홍콩을 향하고 있었다. 유명한 기하학적인 스카이라인이 있는 홍콩의 도심이 아닌, 교외 지역을 말이다. 녹색의 마이 포 습지대와 음산한 분위기의 록 마 차우가 보인다. 이곳들은 중국 정부가 ‘문화적 무정부 상태’인 홍콩과 ‘깨끗한’ 본토를 분리하기 위해 세운 완충지대다.

프랭키스 바 앤 그릴이 위치한 광동 성(省) 선전 시(市) 푸티안 구(區) 귀후아 로(路)는 엄연히 중국 본토다. 그리고 이 가게는 자유무역지대에서 약 15m 정도 떨어져 있다. 프랭키스의 가게 앞면은 좁고, 녹색으로 빛나는 간판이 없다면 그 옆의 창고 건물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다. 이 가게는 트랙터 크레일러들이 잔뜩 주차해 있는 거리 맨 끝에 있다. 그러나 5년 전에 문을 연 이 가게가 급변하는 선전 시에서 제일 가 볼만한 술집이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메이커 그룹들이 맥주와 양꼬치를 먹으며 새벽까지 기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 곳의 시간은 눈부시게 빠른 속도로 흐른다. 지난 1980년 등소평은 목가적인 시골 마을에 불과했던 선전 시를 경제특구 시범지역으로 지정했다. 경제특구는 서구 기업들이 자유롭게 사업을 할 수 있는 장소다. 그리고 경제특구는 성공했다. 그 2년 전인 1978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무역 진흥 정책, 저렴한 숙련 노동력에 매료된 전 세계의 기업인들은 선전으로 공장을 차리러 몰려왔다. 경제특구 지정 전, 선전 시의 인구는 3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재의 인구는 1000만 명이 넘는다. 선전 시의 항구는 중국에서 제일 바쁜 항구다. 사실 이것은 이전에도 잘 알려진 바다. 선전에서는 아이폰을 비롯해 만들지 않는 제품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국의 기술을 다루지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생활을 다룰 것이다.

2013년 현재 선전 시에 장기 체류하는 외국인은 22,000명에 달한다. 그리고 매년 이 도시를 방문하는 외국인은 800만 명에 달한다. 이들의 출신성분은 다양하다. 집까지 구입해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는 제조업계의 베테랑, 드높은 열정과 약간의 담보금만 가지고 비행기에서 막 내린 신생기업 사장, 첨단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를 만큼 무식한 영어 교사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타인과의 접촉을 원하기에,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는 이 도시에 매료되어 모인 이 지극히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들은 사업과는 거리가 먼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 새로운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이 있다. 그것은 바로 혁신적인 변화다. 더워진 바다가 태풍을 키워내듯이, 인류의 불가피한 진보는 국경을 지우고 있다. 변화는 폭풍처럼 격하고, 선전은 미개척지다. 전 세계의 모습을 바꾸는 변화는 이곳 선전에서 가장 극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10억 명이 넘는 국민이 자유롭게 인터넷을 할 수 없게 하는 강력한 정부를 가진 중국. 그러나 그 본토에 서구의 경제와 인력, 문화가 침공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다. 얼마 전 미국 대선 때 터져 나온 격렬한 반 세계화 구호조차도 말이다.

물론 변화로 인한 고통도 크다. 그러나 이 혼란이 지나가고 나면 어떤 것이 성장할지가 벌써 보이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해리스 뉴욕 바(프랑스 파리에 있는 바 이름)에서 고국을 떠나 온 외국인들이 압생뜨(쓴 쑥으로 만든 초록빛 술)를 들이킨 이후, 가장 강력한 문화적 힘을 가진 외국인들이 바로 선전의 외국인 사회다. 해리스 뉴욕 바의 외국인들 역시 힘든 경제적 여건 때문에 고향을 등지고 파리에 와, 변화의 에너지를 제어해 미술, 문학, 음악 등을 만들었다.

선전의 거리를 걸으면 국경 없는 세상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해리스 뉴욕 바 시절과 같은 인물들이 보일 것이다. 꿈을 쫓는 사업가들, 영감을 추구하는 미술가들, 몰락한 상류층들, 자아를 탐구하며 방황하는 이들. 물론 아직 이들 중에 선전판 헤밍웨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 외국인들의 실험 정신, 그리고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이 환경 속에서 선전판 헤밍웨이의 싹은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우리가 선전판 헤밍웨이를 찾지 못한 이유는, 그런 사람은 책을 만들 거라고 선입견을 가진 탓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펜 대신 땜납과 전선을 붙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림이나 시가 아닌 전자기기와 앱에 마음을 빼앗긴다. 또는 어쩌면 선전의 역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좀 다를 수도 있다. 전 세계에서 온 창의 인재들이 모인 이 곳은 기존의 미술 중심지가 아니라, 이제 막 커나가는 글로벌 경제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시장’으로 알려진 SEG 전자광장 내에는 없는 전자제품이 없을 정도다.


● 단기 거주자들
이 도시에 오는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제품 개발과 제작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러 온다. 설계, 시제품 제작, 양산품 제작, 판매, 발송 등이다. 이 곳에서는 공장이 많은 부분을 대행해 주기 때문에, 하드웨어 제작 회사들은 본국에서는 수개월이나 걸리던 일을 여기서는 일주일이면 완료할 수 있다. 첨단기술에 푹 빠져 사는 것이 가능하다.

이런 유형의 방문객 중 좀 눈 여겨봐야 될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공급망 관광객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공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재미로 전자부품을 수집한다. 이들은 이렇게 모은 부품으로 뭔가를 만들지만, 보통은 창의력을 만족시키는 수준이지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경우는 적다.

1. 20세의 최고 기술 담당관 니키 외스터 옌크는 선전에 온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처음들른 곳은 ‘시장’이다.
2. 스페스 마이어스와 프랭크 텅은 레디트의 r/선전 포럼에서 만났다.
3. 자카리 하니는 크로스피터이자 종이 공예가다.4. 음식 탐험가 아리카 길머는 어떤 음식도 가리지 않는다.
5. 조시 비스마노브스키. 선전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출 성형 영업 직원이다.
6. 율리아 카이징거는 사이클링, 하이킹, 해안, 식용 곤충을 좋아한다.


스코티 알렌: 여기는 처음 와보는 것 같군.

제이콥: 지금 백인이 한 명 들어왔군?
스코티 알렌: 그리고 여긴 청도 맥주도 없고 대화가 통하는 수준의 영어를 하는 웨이터도 전혀 없어. 여기 대체 왜 이래? 넌 선전에서 어떻게 살았어?
알렉스 C-G: 지금은 버드와이저밖에 없어, 옆 가게에 는 청도 맥주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찰스 팩스: 버드와이저, 얼마나 차갑냐?
알렉스 C-G: 지금 여기는 대한탄고양퇴야. 버드와이저는 김이 나올 만큼 차갑네

대한탄고양퇴는 구운 양다리 고기를 파는 곳으로, 푸티안의 명소다. 다닥다닥 붙은 테이블 가운데에서는 작은 석쇠 위에 양고기가 습기를 머금은 연기를 내뿜으며 지글지글 익어가고, 그 곁에는 젊은 중국인들이 잔뜩 모여 있다. 사람들이 워낙 빼곡한 곳이지만,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백인 6명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이 6명은 위챗에서 만나게 되었다. 위챗은 중국산 유비쿼터스 통신 앱이다. 이들은 그 앱의 유명한 채팅 그룹인 HQB_2016의 멤버들이다. HQB는 푸티안 구의 일부 지역인 화치앙베이의 영어식 약자이다. 이들은 화치앙베이에서 살고, 놀고, 맛있는 것을 먹는다. 대한탄고양퇴 역시 화치앙베이에 있다. 화치앙베이에는 해커들이 살기 좋은 아파트 구역인 제언도 있다.

알렉스 커티언 그리피스가 억센 영국 사투리를 쓴다. 그는 상하이의 부동산에서 일하러 중국에 왔다. 요즘 그는 스페이스갬빗 사의 제품 기획자로 일하고 있다. 스페이스갬빗 사는 오픈소스 협력을 통해 우주여행이 가능한 문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HQB 그룹의 구성원은 자주 바뀐다. 그러나 75명 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 모임은 공통 관심사로 묶여 있다. 이들은 뭔가를 만들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메이커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더 흔히 불린다.

이들은 선전 시 안팎을 들락날락 거린다. 일 때문에 그러기도 하고, 일이 없어서 그러기도 한다. 그러나 선전 시내에서는 이 그룹이 이들의 지주가 된다. 이들은 양고기와 맥주를 앞에 놓고 어떨 때는 이틀에 한 번, 어떨 때는 1주일에 한번 꼴로 만나 자신들이 만드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찰스 팩스의 온도 기록계는 시장의 절박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 아니다. 다만 찰스 팩스가 갖고 싶어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는 재미 삼아 만들어 본 거라고 말한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이 제품을 갖고 싶어 하는지 알고 싶어서 이를 킥스타터에 올렸다. 이 제품의 수요는 있었다. 그는 이 제품을 단가 165달러에 200개 팔았다. 그는 흥분한 어조로 “세상에는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도 있고, 맥주를 만드는 사람도 있다.”고 말하면서 차세대 모듈형 회로 기판을 시범 보일 거라고 말한다. 이것을 사용하면 무엇이건 기록해서 흑백 화면에 그래프로 표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팩스는 과거 3D 프린팅 기업 ‘메이커봇’의 연구개발부장이었다. 2013년 퇴사한 이후 그는 선전과 뉴욕을 오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는 갈수록 선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다. 그에 따르면 “메이커봇 출신 인물들 여러 명이 중국에 왔으며, 그 중 몇 명은 아예 장기 체류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말을 하면서 기록계의 와이어 프로브 4개를 스풀(spool)에서 풀어냈다. “나는 휴가 때 그 사람들을 만나 해킹 프로젝트를 만들려고 선전에 왔다. 선전에 와 보니 이 곳이야말로 내가 있을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와이어 프로브를 아직 따지 않은 맥주병의 라벨 밑으로 밀어 넣고 온도 기록계를 작동시켰다. 맥주는 차가웠다.

이 그룹의 모든 구성원은 남성이며, 끊임없이 멤버 교체가 이루어진다. 이들은 서로 만나 자신들의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중에는 단체여행 중인 남아프리카인 미디어 아티스트도 있었고, 얼마 전에 해커 밴을 타고 스페인 일주를 한 스페인 엔지니어도 있다. 전 구글 직원인 스코티 알렌은 현재 ‘앱몬스타’라는 이름의 거대 데이터 신생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거대 전자 상점가를 보러 이곳에 왔다. 너드판(nerd) 성지 순례를 온 것이다.

메이커들이 흔히 ‘시장’이라고 부르는 이 곳의 정식명칭은 새격전자광장이다. 콘크리트로 지어진 이 곳의 외관은 마치 아부 심벨 신전을 연상케 한다. 그 속의 물건들에 숭배심이 일어나는 것도 신전과 비슷하다. 이 곳은 팅커러들을 위한 9층 짜리 낙원이다. 누구나 돈만 있으면 원하는 모든 부품을 살 수 있다. 휴대전화 카메라, 모든 종류의 커넥터가 달린 전선 단말, 회로 기판을 만들 수 있는 휠링 머신도 있다. 무인기가 필요한가? 3층에 가서 왼쪽으로 쭉 가면 있다. HDMI 케이블이 필요한가? 5층에 가면 없는 것이 없다.

길 건너 건물에 들어가 거대한 유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 핵스가 있다. 하드웨어 지원 업체인 핵스는 유망한 프로젝트에 10만 달러씩의 자금을 지원해 준다. 조건은 수익의 9% 배분이다. 그리고 선전에 개발팀들을 4개월씩 체류하게 하면서 그 성공을 지원해 준다. 다락방 같은 사무실에서 젊은 엔지니어들은 탁구를 하고 세탁을 하고, 시제품을 만들면서, 중국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핵스의 직원들로부터 성공적인 신생기업을 차리는 법을 배운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29세의 율리아 카이징거 역시 핵스의 ‘졸업생’이다. 선전에 머무른 지 1년 반이 된 그녀는 소속 회사의 가정용 식용 곤충 사육기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그녀의 회사는 킥스타터를 통해, 곤충을 길러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로부터 14만 5천 달러를 투자받았다. 곤충은 지속 가능성이 매우 뛰어난 단백질 공급원이다.

바깥의 폭풍이 다시 사나워지고 있었다. 카이징거는 바깥 건물의 평평한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핵스의 주방 창문 너머로 보고 있었다. 카이징거는 “언제나 ‘몇 달만 있으면 나가야지.’ 라고 생각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 떠날지 아무도 모른다. 카이징거는 제조 전문가는 아니다. 모든 것이 무리 없이 굴러갈 때까지 그녀는 이 도시에 남아 공장 근처에서 지낼 것이다.

현재 카이징거의 준비 상태는 꽤 괜찮다. 그녀는 핵스를 떠나 싸구려 아파트를 찾았다. 아파트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해 중국어 광고를 번역해서 얻었다. 그녀는 이 아파트에서 중국인 여성 3명과 함께 산다. 사무실과는 지하철 1정거장 거리다. 주중에는 늘 사무실에서 살다 시피 한다. “엄청나게 많이 일한다. 정확한 근무 시간은 잘 모른다. 하루에 적어도 12시간 정도?”

카이징거가 긴장을 풀기 위해 시내를 찾고 싶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여기도 술집은 몇 군데 있고 그 정도면 좋다. 그러나 ‘코코 파크’ 같은 곳의 분위기는 마음에 들지 않아.” ‘코코 파크’란 외국인이 많은 클럽 촌이다. “그런 곳에는 중국 여자들을 쉽게 생각하는 외국인 남자들이 엄청 많지.” 선전은 서구인 남성들이 현지인 여성 섹스 파트너를 물색하는 장소로 악명이 높다. 카이징거는 그런 남자들이 벌레보다도 더 징그럽다.

그녀는 주말마다 선전 시내를 빠져 나가려고 한다. “나는 아웃도어 활동을 좋아한다.” 기차를 타고 선전 시 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산, 오지의 공원, 해안이 있다. “바이크 타기와 하이킹을 잘 한다.” 언젠가는 홍콩에도 기차를 타고 가 볼 생각이다. 그 곳의 해안은 더 좋기 때문이다.

버거는 선전에서 매우 비싼 물건이다. 사진 속의 버거 가격은 일반적인 점심 식사의 10배에 달한다.


● 장기 거주자들
선전은 여러 모로 다른 도시들과 비슷하다. 사람들이 일하러 오고, 아파트를 구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단골로 갈 장소를 찾아낸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여러 해가 지나면 사람들은 자신이 선전에 정착했음을 알게 된다. 클리브랜드와도 비슷하다. 물론 클리브랜드는 아니라는 점이 차이점이다. 중국에 사는 사람은 현지 문화에 빠져드느냐, 그렇지 않느냐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한다.

조시 비스마노브스키는 후자를 선택한 사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시절을 합친 것보다 더 긴 세월을 중국에서 보냈지만, 아직도 이 나라의 이방인으로 머물러 있다.

그는 2006년 콜로라도 대학을 졸업하고 덴버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해 보았다. 그러나 커뮤니케이션 전공자를 위한 일자리는 없었다고 한다. 애플 스토어에서 잠시 동안 근무하고, 그는 어머니로부터 빨리 독립하라는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는 공급망 관리 기업 PCH 사에서 6개월 간 인턴 근무를 하러 중국에 갔다. 인턴 근무가 종료되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동안 했다. 그러나 그는 이 곳에서 제조 장비 영업 사원 자리를 얻었고, 10년이 지났고 아직도 그는 여기 머물러 있다.

프랭키스에서 술을 먹고 ‘빅 벅 헌터’를 플레이한 다음날, 비스마노브스키는 여전히 숙취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해장을 하기 위해 MBA라고 불리우는 180그램 와규 버거를 막 주문한 참이었다. 튀긴 치즈와 반숙 계란이 들어 있는 이 버거의 가격은 무려 18달러다. 선전 길거리에서 사 먹을 수 있는 보통 국수 한 그릇의 10배나 된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면, 인간의 배는 창피를 모르는 개다.



비스마노브스키는 자신의 중국어 실력을 뽐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중국어는 매우 뛰어나다. 그는 중국어로 말할 때 결코 말문이 막히거나 더듬거리는 법이 없다. 청산유수다.

그의 삶은 누가 봐도 막힘이 없었다. 그는 월세 1,100달러짜리 2룸 고층 아파트에서 산다. 시세보다는 좀 싼 가격이다. 비스마노브스키는 자신이 가장이 아니라 싱글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그 이유를 추측해 본다. 그는 PCH사를 퇴사한 이후에도, 안정적인 직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그는 현재 중국에서 장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지만, 문화적 뿌리는 여전히 미국에 두고 있다. 그는 일과 관련되지 않은 중국인 친구들이 별로 없다. 여자도 주로 서구인 여자를 만난다. 그는 “외국에서 오래 살아 본 중국 여자라면 또 모를까. 그렇지 않은 중국 여자와 나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다.” 고 말한다.

비스마노브스키는 전 세계에서 온 서구인들로 이루어진 친목 집단의 일원이다. 그들은 함께 농구와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 그의 미국인 친구들 대부분은 선전을 떠났지만, 아직 한 명의 친구가 남아 있다. 그들은 NFL 스트리밍 패키지를 나누어 쓰며 밤새 생방송으로 농구 경기를 본다. 비스마노브스키는 “다른 누구도 이런 걸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 둘이 모이면 매우 목소리가 커지고 주변을 불쾌하게 한다. 우리가 모이면 스포츠 이야기밖에 안 한다.” 고 말한다.

버거가 나오자 비스마노브스키는 자기 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었다. MBA는 너비보다 키가 더 큰 버거다. 집어들자 육즙과 노른자위가 흘러나왔다. 밖에서 내리던 비가 때맞춰 더욱 거세졌다. 마치 버거의 도착으로 인해 박자를 바꾸어 템포를 높이는 선전 시의 주제곡 같았다.

다음 날은 맑고 더웠다. 하지만 태풍이 오기 전의 고요에 불과했다. 폭염 속에서 넓은 광장을 건너가는 종이공예가인 자카리 하니를 보았다. 그의 피부는 동남아시아에서 도저히 그 상태로 유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일만큼 창백했다. 그의 삭발한 머리는 마치 시계 유리처럼 햇빛을 반사했다.

하니는 키가 180cm에 달하는 근육질의 사나이다. 미국인 치고도 큰 키다. 발걸음이 빠른 그는 다층 건물의 계단과 숨겨진 모퉁이를 돌면서도 계속 걷는 속도를 유지할 만큼 강했다. 새격전자광장은 다른 도시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진정한 중국 본토로 우리를 안내했다.

며칠 동안 내린 빗물은, 양지에서는 뜨거운 햇살에 바싹 말라 버렸지만, 쇼핑몰을 받치고 있는 콘크리트 기둥을 따라서는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간 어느 식당의 벽에는 홍콩 액션 스타들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니가 주문을 했다. 식당 종업원은 하니의 유창한 중국어 실력을 보고 무척 놀랐다.

맥주의 온도는 어떤가? 수작업으로 만든 온도 기록계를 사용해 보자.


하니는 일리노이가 고향이지만 성장기의 대부분은 독일에서 보냈다. 그는 환경 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2000년에 평화봉사단과 함께 중국에 왔다. “나는 자메이카와 중국 둘 중 한 나라를 골라서 갈 수 있었다. 나는 두 나라 중 어느 쪽도 잘 몰랐다. 하지만 중국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다.”

그 이후 그는 계속 중국에 머물렀다. 지난 13년 동안 그는 선전 시내, 또는 인근에 살면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협력하면서...“

그의 위압적인 외모에 반항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매우 정중하게 행동하는 멋진 사나이다. 동시에 그는 세계 속에서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그는 미국인이다. 그러나 그는 유럽에서 성장했다. 학교는 미국에서 다녔다. 그러나 졸업하자마자 미국을 떠났다. 그의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그는 중국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공학을 배웠고, 다양한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덕분에 하니는 돈이 많이 벌리는 직장을 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돈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설령 돈이 없어도 굶어 죽을 걱정은 하지 않는다. 선전에서는 생활비가 크게 들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전 그는 살던 아파트에서 퇴거했지만, 그는 친구의 프로젝트를 돕는 보상으로 그 친구의 집 하나를 얻게 되었다.

선전에서의 흔한 정착 생활 과정은 어쩌면 하니가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선전에 정착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하니는 자신을 그렇게 설명하려 들지는 않으나, 그는 일종의 예술가다.

하니는 자신이 하는 일을 ‘디자인 소재’라고 부르지만, 그의 말을 잘 들어 보면 그 실체는 종이공예다. 그리고 흔히 생각하는 종이 눈송이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그는 “종이 엔지니어링과 팝업에 매혹되었다.” 라고까지 말한다. 여기서 핵심어는 엔지니어링이다. 하니는 CAD로 다양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네트워크를 설계하고, 이를 컴퓨터 제어 레이저 커터로 구현한다. 여러 프로젝트는 미적분이다. 복잡한 기하학적 격자와 날이 선 프랙탈(차원분열도형)들은 마치 수정체로 이루어진 초신성처럼 반경을 따라 화려하게 퍼져나간다. 세공이 된 랜턴은 감쪽같이 숨겨진 LED를 사용해 빛이 난다. 그것들을 오랫동안 바라보면, 반복된 수많은 면으로 이루어진 우주가 보인다.

이렇게 다양한 면으로 이루어진 그의 종이 공예는 작은 금속제 인형들이 전투를 벌이는 테이블탑 게임의 팝업 세계를 더욱 실감나게 해 준다. 그가 종이로 만든 바위와 나무는 오크만큼이나 매우 실감난다. 그리고 접어서 눕힐 수도 있어서 보관하기도 쉽다. 그는 페이스북 페이지도 가지고 있고, 매년 인디애나에서 열리는 젠 콘 테이블탑 게임 컨벤션에 전시부스도 낸다. 또한 인터넷 포럼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잠재적인 고객들도 있다.

그는 집에 있지도 않고, 일하러 가지도 않을 때면 테이블탑 게임을 한다. 그와 친구들은 서로의 집, 술집, 식당 등 어디서나 게임을 한다.

그는 이 공예품을 언젠가는 내다 팔고 싶어 한다. 그는 킥스타터에 제출할 좀 모호한 계획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먹고는 살아야지. 현실을 직시할 거다.” 그런 그의 얼굴에 우울함이 내려앉았다.

음식점 점원은 하니의 국수에 조미료를 넣는 것을 깜박 잊었다. 토마토와 고기를 섞어 만든, 단순하지만 맛있는 그 조미료는 미국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사과하는 점원에게 조용히 미소 지으며, 유창한 중국어로 사과를 받아 주었다.

대한탄고양퇴(Lamb Place)에는 수많은 외국인들이 몰려와 양꼬치를 먹는다


● 탐험가들
등소평이 이것까지 예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기술 산업만 보고 선전으로 오지 않는다. 이 곳에 오는 사람들 중에는 다른 기회를 얻으려고 오는 사람도 있고, 그냥 여행을 하고 싶어서 오는 사람도 있다. 영어를 가르치러 오는 사람들도 많다. 돈 많은 국제 학교에서 미국인 아이들이나 중국 부유층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외국인들은 선전을 제2의 상하이처럼 한 몫 단단히 챙길 땅으로 여기지도, 뭔가 새로운 미술적 가치를 추구할 장소로 여기지도 않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이 도시의 신문화 창조에 덜 중요한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엘스페스 마이어스는 난샨의 리넨 티 디저트라는 음식점에서 커피를 마시며 “선전은 내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리넨 티 디저트는 교회 갔다 온 후 가볼만한 장소다. 흰색 식탁보와 크고 긴 의자들이 있다. 23세의 교육 컨설턴트인 마이어스가 돕고 있는 기업은 미국 대학 입학을 노리는 중국 부유층 자제들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내의 어디든 가고 싶었다.” 마이어스는 위스콘신 대학의 모든 중국어 강의를 다 수료했고, 덕분에 꽤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한다.

그녀의 애인인 프랭크 텅은 그녀 옆에 앉아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있다. 그는 ‘메이크’ 지에 근무하다가 선전 시에서 성공하기 위해 퇴직했다. 그러나 아직 성공을 못 거두고 있다. “하드웨어는 의외로 어렵다.”고 그는 말장난을 하며 웃는다. 현재 25세인 텅은 마이어스를 위해 그녀의 교육 회사에서 일한다. 그리고 자유 시간에는 GRE를 공부한다.

두 명 다 교육업에 종사하고는 있지만, 중국에 온 외국인 영어 강사들은 꺼린다. 그들의 분위기 때문은 아니다. 텅은 “영어 강사들 중 대부분은 사회성이 모자라거나, 고향에서 직업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외국인 영어 강사들은 중국 문화보다는 중국 여자에 더 관심이 있다. 카이징거가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다. 텅은 “그런 사람들을 부르는 별칭이 있다. LBH(loser back home: 고향에 돌아가면 루저)가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아리카 길머는 영어 강사지만, LBH는 아니다. 길머는 콜로라도 주 푸에블로 출신으로, 30세다. 휘황찬란한 딤섬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나는 닭발만 시킨다.”고 한다. 이 식당의 대연회장은 다른 식당과 비슷하며, 창문이 없다. 창문이 있었다면 더 많은 비를 맞았을 지도 모른다. 이 주의 두 번째 태풍은 선전에 상륙하기 직전에 북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키가 크고 아름다운 길머는 체육복에 니트캡 차림이었다. 그녀는 1년 반 전 코스타리카로 가는 고등학생 수학 여행을 따라갔다가, 그 이후 선전에 왔다. “코스타리카에 갔다 와 보니 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1년간은 미국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중국에 도착한 지 반 년만에 직장을 구했다. 중국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다.

미국 흑인인 길머지만 인종 때문에 불편한 일을 겪은 적은 없다. 중국인들은 그녀를 ‘흑인’이라기 보다는 ‘외국인’으로 본다고 길머는 말한다. 덕분에 그녀는 강사와 기술자들로 이루어진 유연한 집단 속에 쉽게 끼어들 수 있었다.

첨단기술의 성지, 새격전자광장(SEG Electronics Plaza)의 웅장한 모습이다.


문제가 벌어졌던 것은 헬스클럽이다. “미국에서는 운동을 열심히 한다고 불편이 따르지 않았다.” 그녀는 파워 리프트를 잘 했고, 헬스클럽에 가서 그 운동을 하는 게 큰 일이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큰 일이 되었다. “이곳의 문화는 운동하는 여자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꾸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고, 그녀는 그것이 싫었다. 그러다가 중국 북부 출신 스테파니를 친구로 사귀면서 그 문제는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여기서는 내가 남자들이 하는 걸 한다고 이상하게 본다. 하지만 스테파니 덕택에 나는 그런 시선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근무 시간과 운동 시간 외에는 맛있는 음식을 사냥하러 다닌다. 그녀의 주된 삶의 낙이다. 그녀와 다른 강사들은 여러 술집을 가보았다. 그녀도 프랭키스는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그녀는 미국에서 먹을 수 없는 신기한 맛을 찾으러 다니는 것을 제일 좋아한다. 그녀와 스테파니는 운동 후 먹기 좋은 음식을 찾아 선전을 휩쓸고 돌아다녔다.

많은 서구인들은 진짜배기 중국 음식을 소화하기 어려워하지만, 길머는 처음부터 그런 것만 찾아 나섰다. “그러다가 못 먹을 것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체험으로 인해 받은 당혹감보다, 그 체험을 이야기함으로서 몰려오는 짜증이 더 커 보였다. “오리를 먹다가 어떤 부위를 집어 들었는데, 처음에는 간인 줄 알았지만 좀 달랐다.” 솔직히 말해, 구운 오리 똥을 무슨 수로 알아본단 말인가? “나는 그게 오리의 내장인 줄 알았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한 입 먹어보았다. 그랬더니. 세상에. 그건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간에 길머는 그것을 삼켰다. 그리고 다른 부위를 먹었다. “중국에서 식사를 할 때는 예의가 발라야 한다.” 그러면서 그녀는 웃었다. 닭발이 나오자 그녀는 게걸스럽게 먹었다.

딤섬을 먹는 동안에도 폭풍은 눈에 띄게 세졌다. 선전에서 보내는 마지막 아침이었다. 그리고 그날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했다. 호텔로 들어가자마자 갈 곳이 없어졌음을 알았다. 호텔 안내원은 국경이 폐쇄되었음을 알려 주었다. 그는 호텔 문 앞에 서서 양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당분간 홍콩으로 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호텔의 26층에 위치한 바의 창가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빗방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어두운 창 밖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하지만 지상 90m 상공에서는 태풍은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이 도시는 큰 도시다. 도시를 어지럽히려면 이 정도 태풍으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태풍의 흔적을 찾던 우리의 눈은 넓은 녹색 지대에 쏠렸다. 컨벤션 센터의 웅장한 정문에서부터 초현대식 도시 중심부로 이어진 공원이었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공들여 만들어진 도심 속 쉼터였다. 여러 통로가 공원을 가로지르고 있고, 그늘에는 벤치가 있었다. 그리고 분수, 아치교, 운동을 할 공터도 있다. 로버트 모지스의 꿈이 가장 부드럽게 실현되었다. 이 멋진 공원은 매우 인상적이다. 이 도시의 다른 어떤 것보다도 압도적이다. 이 공원은 두 건물 사이의 모든 건물 지붕 위에 걸쳐져 있다. 공중 공원이기 때문이다.

매우 뛰어난 도시 기획자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이런 공공 시설을 선전에서는 볼 수 있다. 도시화의 역사가 짧은데도 큰 건물에는 어김없이 쇼핑몰이 입점해 있다. 건물 옥상에는 어김없이 녹지가 있다. 이 컨벤션 센터는 구식이 아니다. 이 컨벤션 센터는 오늘날 선전의 정수다. 심사숙고를 거쳐 만들어진 크고, 새로운 도시의 상징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계획할 수는 없다. 콘크리트 틈새에도 꽃들은 피어나는 법이다. 선전에서 신 문화의 새싹들은 세계화의 폭풍을 자양분삼아 유리와 철로 된 건물들을 집어삼키고자 한다. 선전은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무언가의 기반일 뿐이다.


서울경제 파퓰러사이언스 편집부/By Joe Br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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