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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배척법, 또?





한 사람이 중국인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 적이 있다. ‘쓰레기’와 ‘성실한 민족.’ 한 입으로 두 얘기를 한 사람은 스탠퍼드 대학 설립자인 릴런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캘리포니아의 사업가 출신 정치인으로 1858년 ‘중국인과 몽골계 인종의 이주 금지법’을 추진할 때는 ‘인종 쓰레기’라고 불렀다.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대륙횡단철도에 투자한 뒤부터는 평가가 극단적으로 바뀌었다. ‘성실하고 근면한 민족’으로.

스탠퍼드의 평가가 극에서 극으로 바뀐 이유는 대륙횡단철도 공사. 쿨리(중국인 노동자·苦力)들의 맹활약 덕분이다. 좀처럼 진척되지 않는 난공사 구간인 로키산맥 터널 공사도 쿨리가 대거 투입되고 나서야 뚫렸다. 1869년 개통된 대륙횡단철도 공사에서 희생된 중국인 노동자는 최소한 40여명에 이른다. 스탠퍼드는 “중국인 50만명만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못할 게 없다”고 추켜세웠다. 그럴 만 했다. 궂은 일은 도맡아 하면서도 임금은 백인 미숙련공의 절반 이하였으니까.

그렇다면 처음에는 왜 ‘쓰레기’라고 했을까. 캘리포니아 금광 발견(1848년) 직후부터 유입된 중국인 노동자가 백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을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미국 경제를 성장시키고 큰 땅덩어리를 하나로 만든 대륙횡단철도가 완공된 직후 미국인들의 마음은 또 변했다. 근거 없는 증오가 판치고 중국인들을 괴롭혔다. 1871년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는 백인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차이나타운에 난입해 물품을 약탈하고 불을 질러 중국인 17명을 죽였다.

이민의 나라인 미국에서 중국인 혐오증이 퍼진 데에는 크게 정치와 경제 측면의 두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먼저 정치적으로 백인 신교도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포퓰리즘이 일었다. 감자 대기근(1845~1852)을 겪은 아일랜드인들이 살길을 찾아 미국에 대거 이주하며 저임금 노동을 차지하자 일자리를 뺏긴 영국계 빈민 사이에서 괴소문이 돌았다. ‘미국을 차지하려는 교황청의 음모’론이 퍼지고 자연스럽게 토착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가뜩이나 금융 및 산업자본가들에 대한 농부들의 반감이 컸던 상황. 새로운 이민을 받지 말고 가톨릭 계열의 미션 스쿨에 대한 교육 보조금을 끊자는 정강을 내세운 미국 토착주의당(Natvie American Party)이 돌풍을 일으켰다. 1855년 선거에서는 하원에서 43석을 얻었다. 얼마 안 지나 이들은 ‘무지당(無知 黨·the Know-Nothing Party)’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가톨릭 성당 공격과 파괴, 폭력으로 당국의 조사를 받을 때마다 소속 정당에 대한 질문이 나오기만 하면 ‘아무 것도 모른다(know-nothing)’며 딴청을 부려 이런 별명이 붙었다.

무지당은 1850년대 후반부터 기존 정당에 흡수되며 사라졌지만 외국인에 대한 반감은 양대 정당에 스며들었다. 결정적으로 1873년 발생한 공황이 외국인 혐오증을 심화시켰다. ‘인류가 한꺼번에 경험한 세계최초의 공황’, ‘1929년 발생한 세계대공황의 지속기간 43개월보다 훨씬 긴 65개월 동안 이어진 장기공황(the Long Depression)’의 여파로 사람들의 인심이 팍팍해졌다. 정치인들은 앞장서서 ‘외국인 때문에 미국 경제가 나빠지고 선량한 백인이 일자리를 잃는다’며 ‘가짜 뉴스’를 쏟아냈다.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은 한 발짝 더 나갔다. 중국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캘리포니아 백인들의 불만이 가장 컸다. 당시 미국 내 중국인 숫자는 중국인 10만5,465명. 실제로는 30만명에 가까웠다. 특유의 근면으로 경제력을 키워 나가는 중국인들을 향해 서부 출신 정치인들은 ‘중국인들은 뇌의 용적이 부족하다’는 비하 발언과 함께 중국인의 이민을 금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1882년 4월4일 발의된 ‘중국인 배척법(Chinese Exclusion Act)’은 불과 한 달여 만에 하원(202 대 37), 상원(32 대 15) 표결과 대통령 서명까지 일사천리로 마쳤다.



‘중국인의 미국 시민권 획득과 이민을 20년간 금지한다’는 중국인 배척법은 미국 최초로 성문화한 이민제한법. 이민의 나라가 이민을 원천 봉쇄한 것이다. 법으로 틀어막고도 미국의 중국인 박해는 끝나지 않았다. 1885년 와이오밍의 록스프링스에서는 중국인 500명이 모여 사는 차이나타운에 백인 무뢰배들이 무단 침입, 28명을 살해하고 주민들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저항도 소용없었다. 법정에서 중국인들에게 정당 방어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전혀 없다(He doesn‘t have a Chinaman’s chance)’는 관용어구가 이때부터 생겼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던 중국인들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 돈을 벌어 가족을 초청한다는 것이었지만 중국인 배척법은 수많은 이산가족을 낳았다. 유색인종과 백인 간 결혼도 막아 남초(南超) 현상이 극심한 차이나타운의 젊은이들은 총각 귀신으로 늙어갔다. 미국은 이웃 국가가 동참하지 않으면 중국인 배척법의 효과가 떨어진다며 캐나다까지 종용했다. 캐나다는 1885년 7월, 중국인 이민법(Chinese Immigration Act)을 마련, 중국인 이민 1인당 인두세 50달러를 매겼다.

중국인 배척법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임 노동력 부족에 봉착한 하와이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일본인들을 불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인이 하와이 단순 노동시장의 70%를 차지하며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농장주들은 또 다른 대안을 찾았다. 온순하면서도 근면하고 일본인과 섞이기 싫어하는 조선인을 주목한 것이다. 서구 세계로의 최초 이주인 하와이 이민(1902년)이 이렇게 시작됐다.

중국인 배척법은 중국이 2차 세계대전 동맹국으로 부상된 1943년에서야 사라졌다. 대신 미국과 전쟁 중인 일본 출신 미국인 또는 영주권자 약 10만명이 3년 동안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미국은 아시아인에 대한 이민 규제도 1965년 폐지했지만 차별이 정말 없어졌을까. 여전한 곳이 적지 않다. 아시아계 학생들은 어느 인종집단보다 우수한 성적에도 미국 명문대 입학 전형에서 유무형의 불이익을 받는다. 연방 하원이 2012년, 130년 전의 중국인 배척법에 유감을 표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누군가 ‘역사는 반복된다. 한번은 희극으로, 또 한번은 비극으로’라고 말했던가. 오늘날 미국의 상황은 ‘중국인 배척법’이 등장한 135년 전과 여러 관점에서 닮은 꼴이다. 중산층 이하 백인 하층민의 절대적인 지지로 미국 대통령에 오른 도널드 트럼프는 법원의 제동은 아랑곳없이 이민을 제한하는 법을 강화하고 있다. 멕시코로부터의 불법 이민 유입을 막는다며 국경에 거대한 장벽도 세울 요량이다.

잘 안되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정치는 치졸하다. 공자는 일찍이 논어 위령공편에서 ‘군자구저기, 소인구저인(君子求諸己, 小人求諸人)’이라고 말했다. 군자는 자신을 탓하고 소인배는 남을 탓한다는 뜻이다. 소인배만도 못한 대통령이 왜 이리 많은지.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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