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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포기 없는 '오뚝이' 소녀의 좌충우돌 창업도전기

서경미 에이프릴 대표

서울 중구 퇴계로 본사에서 만난 서경미 에이프릴 대표가 5년전 창업할 당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서경미(사진·36) 에이프릴 대표는 지난 2012년 부푼 꿈을 안고 기업간거래(B2B) 온라인 커머스 사업을 시작했지만 1년 만에 개발을 맡은 직원에게 사기를 당하면서 수십억원을 날렸다. 개발자에게 관리 권한의 상당 부분을 맡겼는데 그가 회사 도메인 주소와 서버, 기반 기술까지 모두 훔쳐 달아나는 어처구니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미리 대금을 받은 상태였는데 사업체가 없어지다 보니 사용요금을 물어줘야 했다.

서 대표는 “임신하자마자 사건이 터졌고 가족들의 도움을 받고 사채까지 빌려다 쓰며 일을 수습한 후 1년 넘게 직원들에게 월급 한 푼 주지 못했으니 출산할 시기가 됐을 때는 병원비조차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포기할 법도 하지만 그는 다시 이를 악물고 달렸다. 여기서 멈추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여기서 포기하면 이제 막 태어난 아이에게 얼굴을 들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생태에서 다시 일에 매달렸다. 아이를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하루에 3~4시간씩 자며 도매 시장을 돌며 사람을 만났다. ‘링크샵스’는 개인 사업자·가게 등 소매 시장과 제조·도매 판매자들을 연결하는 온라인 마켓 플랫폼인 만큼 신뢰가 중요하다. 그는 직접 사장님들을 만나 제조시설을 일일이 확인하며 뛰어다녔다. 그렇게 1년을 보내자 다시 고객들을 확보할 수 있었고 사업이 자리를 잡으면서 벤처캐피털(VC)로부터 투자도 받았다. 직원들의 밀렸던 월급도 모두 지급했다. 현재 ‘링크샵스’에 등록한 판매자 수는 5,000명에 달하고 매일 올라오는 상품만 3,000개다.

◇똑 부러지게 할 말은 했던 소녀

유치원 졸업식에서 고운 한복을 차려입고 꽃다발을 든 채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일곱살 때의 서경미 대표.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난 서 대표는 줄곧 그곳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어렸을 때부터 어딜 가든 눈에 띄었다. 학창시절 내내 학급 임원은 도맡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반장선거 기간이 됐는데 선거를 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병원을 운영하는 부잣집 아들을 지목해 반장으로 세웠다. 9살이던 그녀는 또박또박 반장선거를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이렇게 선생님이 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따졌다.

“공정하게 선거를 하면 제가 반장이 될 수도 있는데 부잣집 남자애를 지목한 선생님이 야속했죠. 그날 집에 돌아가서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나요.”

결국 선거를 치르게 됐고, 그녀는 반 친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반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임원 학생의 부모는 기부금 명목으로 학교에 돈을 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그녀의 어머니는 아버지 몰래 돈을 꿔다가 학교에 기부금을 내곤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에 대한 뭉클함이 떠올랐는지 이 대목을 말할 때 서 대표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중학교 때도 3년 내내 학생회장을 한 그녀다. 새로 지어진 학교여서 1학년 때부터 회장을 할 수 있었던 것. 서 대표의 어머니는 이때도 학부모회 일을 도맡아 해주셨다.

“엄마가 없었다면 지금의 제 모습은 있을 수도 없었어요. 어려서부터 사업을 하는 지금까지, 언제나 딸을 응원하고 격려해주시고 항상 옆에서 밀어주는 든든한 지원군이세요.”

◇사업에 눈 뜨다

미국 그랜드캐니언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서 대표.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와 다부짐이 느껴진다.


국내에서 원하는 대학 진학에 실패한 후 서 대표는 미국 라스베가스로 떠났다. 당시 유행하던 드라마 ‘호텔리어’를 보고 감명받아 호텔 쪽 일을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 시기와 맞물려 집안 사정도 어려워졌다. 아버지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시력에 문제가 생기셨기 때문.

“아버지는 차근차근 모으신 돈으로 트럭 여러 대를 사서 운수업을 하고 계셨어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지시면서 사업 운영이 어려워졌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에서만 교통사고를 여러 번 당했다. 좌절할 법도 했지만 그녀는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스무 살 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고 교통사고가 났던 게 오히려 제가 사업을 시작하게 된 인생의 터닝포인트였어요.”

일단 영어라도 배워볼 생각으로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2001년 관광도시 라스베이거스의 경기는 최고 호황이었다. 원가보다 10배 높게 가격표를 붙여 팔아도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하루는 서 대표가 마른 걸레로 가게 유리를 닦고 있었다. 구멍이 나고 옆으로 헤지고 늘어진 걸레였다. 손님의 물건을 계산해주러 잠시 걸레를 선반에 두고 계산대에 간 순간, 손님이 물었다. “저거 스카프인가요?”

서 대표는 엄청난 호황에 놀랐고 이 상황을 활용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무엇이든 그냥 걸어두기만 하면 팔려 나가던 시절이었어요. 집에 가면 인터넷으로 한국에서 가져다가 팔만한 물건이 없을까 찾곤 했어요.”

어느 날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스탬프 식 네일아트 상품이었다. 기념품 가게에 오는 미국인들은 다른 치장은 하지 않아도 유난히 손톱 꾸미는 것을 좋아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에서는 네일아트가 대중적으로 유행하지 않았던 때다.

그녀는 돌려받은 학비를 몽땅 털어 네일아트 제품을 구입했다. “사장님한테 네일아트 제품 팔아보라고 했는데 싫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구석에 공간을 주면 임대료를 내고 제가 해보겠다고 했어요. 사장님은 해보라고 하셨어요. 어린 제가 제안했으니 그닥 큰 기대를 안 한 거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념품 가게에서 서 대표가 가져다 놓은 스탬프 네일아트 상품은 완판됐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스물 한 살 대학생

지난 2005년, 서 대표가 사업에 성공한 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부모님과 함께 찍은 사진. 세 분의 미소에서 사랑과 애틋함, 행복이 묻어난다.


사업의 단 맛을 경험한 서 대표는 기념품 가게에서 나와 매장을 물색했다. 근처 백화점이 좋아 보였다. 갓 스무 살이 된 한국인 소녀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내 백화점으로 매일 출근했다. 매장을 관리하는 백화점 매니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버텼다.

“오늘은 오후 3시에 매니저가 들어올 것 같아요.”



2주쯤 지나자 매니저 사무실 앞 프론트 직원 매니저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만날 수 있는 팁을 주곤 했다. 그렇게 무작정 사무실 앞에 서 있기를 한 달. 마침내 미국인 매니저는 서 대표를 만나줬다. 좋은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작은 공간을 마련해달라고 간절하게 요청했고, 마침내 매장 사이에 세워놓을 수 있는 소형 부스 2개 자리를 얻어냈다.

“영어도 잘 못했지만 저는 부끄러움은 없었어요. 잘 될 거라는 확신만 있으면 끝까지 버티는 아집 하나는 타고난 것 같아요.”

매장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으니 처음엔 손님이 없었다. 서 대표는 적극적으로 상품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지나다니는 손님들에게 말을 걸었다.

“손톱에 빨간 장미꽃 하나 만들어드릴까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님의 손가락을 가져다가 손톱에 네일아트 도장을 꾹 찍었다. 10초 만에 장미꽃이 생기자 미국인들은 신기해했다. 그렇게 며칠 했더니 키오스크 앞으로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번 상품을 사 가면 재구매 요청이 들어왔다.

서 대표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고객들과 직접 소통했고 덕분에 2만 달러 어치 제품은 모두 팔렸다. 백화점 내에서 소문이 나면서 유대인 사업가들은 그녀에게 네일아트 사업권을 팔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

서 대표는 소형부스 2개와 웹사이트를 합쳐 70만 달러에 매각했다. 생전 처음으로 8억원의 거금을 손에 쥐게 됐던 그때, 서 대표의 나이는 21살이었다. 당시 돈은 사업의 종잣돈이 됐다.

그 후부터는 백화점 매니저도 흔쾌히 서 대표에게 매장을 내줬다. 새로운 사업을 궁리하다가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 오는 사람들은 행운을 바란다는 걸 깨달았다. 게임장과 도박장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래서 시작한 네잎클로버 기념품 사업, 브랜드 이름은 ‘굿럭(Good luck)’이었다.

“미국 사람들이 핸드폰 줄을 몰랐어요. 한국에는 이미 많이 대중화돼 있었구요. 미국 사람들은 핸드폰 옆에 핸드폰 줄을 달도록 나 있는 구멍이 무슨 용도인지 잘 모르더라고요. 이거다 싶어서 한국에서 네잎클로버 핸드폰 줄이랑 액세서리를 수입해서 팔았는데 대박이 났어요.”

하루는 한 손님이 오더니 서 대표에게 “고맙다(Thank you)”를 연발하며 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겠다고 했다. 게임장에서 2,000달러를 잃었었는데 네잎클로버 상품을 사 간 뒤 1,000달러를 땄다는 게 이유였다. 그녀는 그 날 이후 네잎클로버 제품을 팔면서 일일이 고객들에게 이름 칸이 비워진 카드도 제공했다. 선물용으로 팔리는 제품 매출이 급격히 성장했다.

서 대표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사업 성공 비결로 꼽았다.

“특별히 사업 수완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굳이 비결이라고 하면 세상을 세심하게 관찰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주변을 잘 살펴보면 내가 인식하지 않았던 세상이 보여요.”

그녀는 지금의 환경에서 조금 벗어나서 세상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고 강조했다. “제가 미국에서 성공했던 사업 아이템 중 한국에서 수입해서 판매한 것들이 많았어요. 그렇다 보니 한국에 와서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작은 나라 안에만 갇혀 있지?’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 것 같아요. ‘Made in Korea(메이드 인 코리아)’는 세계 시장에서 인지도와 평판이 좋습니다. 돈이 없어서, 내가 처한 상황과 여건 때문에 해외로 눈을 돌릴 수 없다는 생각을 버리고 차분히 시야를 전 세계로 돌리면 사업 아이템은 무궁무진하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2막, 지금 시작합니다

서 대표는 링크샵스 서비스를 글로벌 패션 B2B 온라인 마켓 플레이스로 성장시키기 위해 오늘도 사력을 다한다.


미국에서 승승장구하던 서 대표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인으로 미국에서 사업하며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았던 탓이다.

“한국인 신분에 시민권도 없다 보니 항상 미국인 사업 파트너가 필요했어요. 문제는 제 아이디어로 사업이 성장하고 나면 사업의 상당 부분의 공을 빼앗기는 일이 발생했죠.”

그렇게 돌아온 서 대표는 ‘링크샵스’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온라인 패션 몰인 링크샵스는 B2B 거래만 가능한 플랫폼이다. 링크샵스에 물건을 올리는 판매자는 자체 제조설비를 갖춘 동대문 쪽 판매자들이고, 최종 소비자에게 패션상품을 판매하는 개인사업자 혹은 소매업자가 링크샵스의 고객이다. 최근에는 카카오스토리나 블로그를 통해 소소하게 쇼핑몰을 운영하는 사람들도 많아져 고객 수는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16년간 사업가로 살아온 서 대표는 링크샵스 운영에서도 고객이 원하거나 고객에게 필요한 가치를 최우선으로 둔다. 이는 곧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링크샵스의 첫 번째 매력은 직접 동대문 새벽시장에 오지 않고도 소매업자들이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다는 점이다. 링크샵스에 등록된 동대문 도매업자들의 상품을 클릭으로 구매할 수 있다, “대부분 패션 소매업자 분들은 저녁까지 장사하신 후에 밤에 도매 물건을 사러 시장에 가세요. 제대로 잠을 잘 시간이 없어 늘 피곤함에 시달리시는 게 안타까웠어요.”

또 링크샵스에서는 낱장 구입이 가능하다. 이는 링크샵스의 구매력 덕분이다. “보통 도매시장에서 직접 물건을 사려면 대량으로 구매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서 소매업자들은 불필요하게 사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링크샵스를 이용해 상품을 사는 고객 수가 많다 보니 저희는 낱장으로도 팔 수 있죠.”

최근에는 배송 서비스도 시작했다. 가게 문을 닫은 후 저녁 9시에 링크샵스 쇼핑몰에서 “상품을 주문하면 다음날 매장 오픈 전에 받아 볼 수 있다. 서 대표는 이 서비스를 하기 위해 자체 배송차량을 구입해 운영한다. 지금은 부산과 대구 지역에서 운영하고 있지만 점차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장사하는 분들에게는 속도가 참 중요하잖아요. 고객들의 니즈(needs)에 따라 서비스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링크샵스를 이용해 성공하는 소·도매업자 고객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서 대표는 가장 뿌듯하다고 한다. 서 대표는 링크샵스 서비스를 글로벌 패션 B2B 온라인 마켓 플레이스로 성장시키기 위해 오늘도 사력을 다한다.

서 대표는 창업은 절대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끈기 있게 버텨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창업하자마자 성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어요. 또 한번 성공했다고 해도 계속 그 삶이 보장되지 않는 게 창업 시장인 것 같아요. 제 경우도 정말 포기하려면 진작에 몇 번이나 포기했어야 했어요. 사업은 나 혼자만 힘들어지는 게 아니라 주변 가족, 지인들까지 모두 힘들어질 수 있잖아요. 몇 년 전에 사기 당해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하면서 본의 아니게 직원들에게도 피해가 갔던 것처럼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힘은 내가 가는 길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만큼, 내 자신을 스스로 믿어주고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가야죠.”

몇 번을 넘어져도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한발 한발 전진하는 그녀의 오늘, 그리고 내일을 응원한다.

/백주연기자 nice89@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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