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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과 총이 결정한 역사의 분기점, 체리뇰라 전투





1503년 4월28일, 이탈리아 남부 체리뇰라(Cerignola) 마을. 나폴리 왕국의 지배권을 두고 대립하던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맞붙었다. 선수를 친 쪽은 스페인. 곤잘레스 코르도바 장군은 프랑스군의 병참선부터 건드렸다. 작은 마을이지만 프랑스군의 보급 거점이던 체니뇰라를 점령한 것. 프랑스는 서둘러 대응 병력을 보냈다. 급속 행군으로 체리뇰라에 당도한 프랑스군 약 9,000명. 스페인군 6,300명보다 많았다. 스위스 용병대 3,500여명까지 포함한 프랑스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5~7m 길이의 장창(長槍·pike)으로 무장한 스위스 창병의 밀집대형은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 최강이었다.

대포 역시 프랑스군 40문이지만 스페인군은 20문. 그나마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스페인군 포병대는 한동안 기능을 잃었다. 원인 모를 폭발이 일어난 탓이다. 객관적으로는 절대 불리한 조건이었으나 전투의 결과는 스페인의 압승. 프랑스군은 4,000여명이 죽거나 다친 데 비해 스페인군 사상자는 100여명에 그쳤다. 스페인이 완승을 거둔 체리뇰라 전투는 규모가 크지는 않았어도 유럽 역사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참호 같은 야전 축성술이 중시되고 화약 병기의 우위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무엇보다 군과 전투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 연구하고 변화해야 승리할 수 있다는 근대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퍼진 것이다.

처음부터 두 나라의 전력은 뚜렷한 색깔 차이가 있었다. 영국과 100년 전쟁을 치른 프랑스는 적의 원거리 투사무기(장궁 또는 석궁)를 파괴할 수 있는 포병 화력과 단번에 적진을 쓸어버리는 중장갑 기병대를 소중하게 여겼다. 반면 이슬람 왕국들을 상대로 무려 8세기 동안 게릴라전을 펼쳤던 스페인은 보급선 차단을 우선시했다. 프랑스는 정규전, 스페인은 임기응변에 강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전투 조직 구성에서도 둘은 달랐다. 프랑스는 전통을 중시하고 스페인은 전장 환경에 맞는 전투 편성을 보다 선호했다.

체리뇰라 전투의 시작도 프랑스가 자랑하던 중장갑 기병의 돌격으로 시작됐다. 말이 달리는 속도와 충격력으로 적진을 돌파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스페인군에게는 지형과 장애물, 그리고 총이라는 세 가지 비책이 있었다. 먼저 스페인군은 언덕의 경사면에 병력을 깔았다. 중장갑 기병을 태운 말들은 언덕을 숨 가쁘게 오르며 장애물에 걸리거나 깊은 참호 속에 빠졌다. 참호 속에는 화승총(아르케부스)으로 무장한 총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프랑스군의 총 지휘관인 네무르 공작도 돌격하다 참호 앞에서 총 맞아 죽었다.

기병대가 와해되자 스위스 장창대가 나섰지만 역부족. 전력을 고스란히 보전한 스페인 기병과 창병, 총병의 합동 공격 앞에 스위스 창병들도 물러났다. 근 200년 동안 패배를 모르던 스위스 장창병의 신화도 이때 깨졌다. 스페인군은 요행으로 이긴 게 아니라 지략과 제병(諸兵) 합동공격으로 적을 물리쳤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스페인군은 결국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고 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승리를 따냈다.



코르도바는 1515년 사망(62세)했어도 그가 남긴 전략을 숙지하고 군 구조를 바꾼 스페인은 1525년 밀라노 인근에서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괴멸시켰다. 포로가 된 프랑스왕 프랑수와 1세가 석방 조건으로 바친 금화와 은화는 몇 개 인지 파악하는 데만 4개월이 걸렸다. 파비아 전투에서도 귀족들로 구성된 프랑스군의 중장갑 기병대는 스페인군 소총수와 기병, 장창병들의 연합 공격에 박살났다. 요즘 가격으로 환산하면 단가 600달러짜리 화승총이 수만달러 짜리 중장갑 갑옷과 말의 속도를 이긴 것이다.

코르도바가 세운 전술의 핵심은 장교 증원과 병력 구성의 변화. 체리뇰라 전투 8년 전에 일어난 세미나라 전투에서 프랑스에게 대패한 코르도바는 ‘생애 첫 패배’를 교훈 삼아 군 편제부터 고쳤다. 보병의 기본 무기를 검에서 창으로 바꾸고 화승총병의 비중을 높였다. 코르도바가 바꾼 전투 편제는 기병과 창병, 총병 3,000명으로 이뤄진 ‘테르시오(Tercio)’로 이어졌다. 창병 10개 중대에 총병 2개 중대로 편성되는 테르시오는 네덜란드와 스웨덴의 순환 진영에 밀리기까지 140년여 동안 유럽의 전장을 지배했다. 유럽은 화승총과 테르시오 진영의 변형진법으로 오스만튀르크와 상대하고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양성과 유지에 돈이 많이 드는 중장갑 기병이 한낱 소총수의 저격으로 사라지는 시대가 열리며 귀족의 특권도 차츰 사라졌다. 코르도바는 체리뇰라 전투를 앞두고 장교 수도 늘렸다. 이전까지는 장교 1명이 병력 300~600명을 지휘했으나 체리뇰라 전투 직전부터 병사 300명을 간부 5~6명이 맡는 체제로 바뀌었다. 늘어난 장교 충원을 위해 각국의 귀족 뿐 아니라 부유층이나 평민 자제 중에서도 군의 하급 지휘관을 선발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군대는 점점 더 강력해지고 최강의 군대로 거듭났다. 제국의 영역도 동부 유럽에서 스페인 전역, 네덜란드와 벨기에 일대,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전역과 필리핀 등으로 넓어졌다.

문제는 지속적이지 않았다는 점. 전투에서 승리하고 땅이 넓어질수록 스페인 제국은 속으로 멍들었다. 제국의 확장을 지탱할 경제 구조가 없었던 탓이다. 경제가 부실해지는 데도 역대 국왕들은 끊임없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젊은이들은 학문에 정진하거나 노동을 경시하고 전쟁에 참가해 전공을 올리는 데 관심을 쏟았다. 결국 국내 생산 기반이 무너지고 수입으로 지탱하는 와중에서도 스페인은 전쟁 사업에 매달렸다. 결과는 국가 부도. 16세기에만 세 차례 지급 불능을 선언했다. 스페인제국이 온갖 대외전쟁에 끼어들지 않고 국내 경제에 신경을 기울였다면 좀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었을까. 모를 일이다. 다만 아이러니한 점이 있다. 4~500년 전 스페인과 비슷한 성향을 보이는 나라가 21세기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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