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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서령(禁書令)의 말로

금서령(禁書令)의 말로





‘어디서든 마르틴 루터의 저술이나 책ㆍ교리를 인쇄하거나 읽거나 지지하는 행위를 금지하노라.’ 스페인 국왕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카를 5세가 1529년 5월8일 내린 금서령(禁書令)의 골자다. 스페인과 독일 지역, 요즘의 네덜란드와 벨기에ㆍ이탈리아 일부까지 지배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최전성기. 유럽을 쥐락펴락하던 합스부르크가의 수장 카를 5세가 내린 칙령은 시퍼렜다. 루터의 책이 불타고 출판을 시도하는 인쇄업자는 반역죄로 몰렸다. 6개월 후 카를 5세는 칙령의 범위를 넓혔다. ‘이교도의 책과 그 비슷한 것들도 아울러 금지하노라.’

애매모호한 표현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모조리 금지하겠다는 의도다. 권력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책자에는 성서도 있었다. 라틴어 성서의 한 구절이라도 스페인어로 번역하면 처벌 당했다. 평민이 읽고 토론하는 게 두려워서다. 루터의 저술에 국한됐던 합스부르크 치하의 스페인과 독일, 저지대 지방의 금서는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루터가 보름에 한 권 꼴로 팸플릿이나 소책자를 출간한데다 교회나 각국 정부가 걸핏하면 금서라는 족쇄를 채웠기 때문이다. 1546년에는 295권의 금서 목록이 발표되고 1551년 364권, 1559년에는 650권이 금서로 찍혔다.

금서를 통해 백성들에게 문맹과 맹목적인 복종을 강요하려던 의도는 성공했을까. 부작용만 낳았다. 나날이 발전하는 인쇄기술 때문에 쏟아져 나오는 출판물을 모두 검열하기도 벅찼다. 오히려 금서로 지정된 책은 더 빠르게 퍼졌다. 수많은 제후국과 도시국가 난립한데다 신교도 제후가 많아 합스부르크의 지배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던 독일 지역에서는 금서가 공공연히 나돌아다녔다. 교회는 금서 목록을 수시로 추가하고 인쇄공장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으나 소용없었다. 아무리 검열관을 투입해도 빠르게 증가하는 금속활자 인쇄소를 모두 감시하기란 불가능했다.

더욱이 금서로 일단 지정되면 세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수요가 몇 배씩 늘었다. 니콜 하워드 캘리포니아 주립대 교수의 저서 ‘책, 문명과 지식의 진화사’에 따르면 금서는 오히려 책의 가치를 높여줬다. 금서의 대부분이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다. 약간의 창의력과 믿을만한 인쇄공 몇 명만 있으면 금서를 몰래 인쇄해 큰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각국 정부와 교회는 대형 인쇄업자들에게 소규모 인쇄업자들을 감시하고 관리하는 업무까지 위탁했으나 눈앞의 실익을 쫓아 빠져나가는 인쇄업자들을 막지 못했다. ‘책을 팔아 성공하려면 교회에 금서 지정을 부탁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도 생겼다.

진짜 문제는 스페인의 창의력을 말살시켰다는 점. 신대륙에서 유입되는 막대한 금은보화를 갖고도 합스부르크 가문 치하의 스페인이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유지하지 못한 데에도 지식에 대한 억압이 깔려 있다.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출판이 가능했던 네덜란드와 영국이 스페인을 제치고 차례로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신생 독립 국가 미국이 빠른 시일에 강국으로 부상한 이유도 구대륙(유럽)보다 훨씬 광범위한 출판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았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다. 근대 국가로는 처음으로 체계적인 출판 검열과 금서, 분서(焚書)를 광범위하게 자행했던 스페인은 결국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났다.

비단 스페인뿐이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은 금서의 유혹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이적 행위나 신성 모독, 도덕·풍기 문란을 이유로 무수한 서적들이 금서로 묶였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 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소크라테스를 조롱하던 희곡을 써 사약을 받게 하는 데 영향을 끼친 작가)의 ‘리시스트라타’는 기원전 410년 반국가적이고 반가정적이라는 이유로 출판 및 공연 금지를 당했다. ‘책을 태우는 곳에서는 결국 사람도 태우기 마련’이다(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기원전 213년 중국 진나라 진시황은 책을 불태우고 유학자 460명을 산 채로 파묻었다.



주쯔이(朱子儀) 베이징 위옌대학 교수의 저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하게 하라’에 따르면 집단의 광기와 결합한 지식의 말살은 더욱 위험하다.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은 1933년 5월, 베를린 시내에 대학생 수천명을 모아놓고 유대계 작가들의 저작을 비롯한 ‘비독일적인 책’들을 불살랐다. 나치 독일은 패망할 때까지 ‘위대한 독일 정신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1억권이 넘는 책을 태웠다. 독일의 분서 소식을 들은 헬렌 켈러는 뉴욕 타임즈에 “사상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역사가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한 것”이라며 “독재자들이 분서를 저지를 때마다 올바른 사상이 맞서 일어나 결국 독재자를 멸망시켰다“라는 기고문을 실었다.

미국은 독일과 정반대의 행보를 걸었다. 미국의 여류 변호사이며 저술가인 몰리 굽틸 매닝은 저서 ‘전쟁터로 간 책들’에서 이렇게 강조한다. ‘히틀러가 인쇄된 글자를 파괴함으로써 파시즘을 강화할 때, 미국은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독서를 권했다. 나아가 그들은 전장에 나간 군인에게까지 책을 사서 보냈다.’ 미국이 2 차 대전 중반부터 1947년까지 병사들에게 보낸 책은 1억2,300만권. 병사들은 참호 속에서 책을 읽었다. 책은 병사들을 강하게 만들었다. 책이 병사를 살린 적도 있다. 군복 상·하의에 쏙 들어갈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책이 총탄으로부터 병사를 구해 준 것이다.

시간 나면 만화 정도를 보던 수백만명의 미군 병사들이 전선에서 기른 독서 습관은 개인뿐 아니라 미국까지 살렸다. 제대군인원호법(G.I. Bill) 덕분에 종전 후 대학에 진학한 참전용사, 늦깎이 대학생들은 일반 학생들보다 진지한 태도로 수업을 듣고 책에 파묻혔다.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지식을 습득하려던 참전용사들에게 강의실 수업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현대 경영학의 스승으로 여겨지는 피터 드러커가 ‘미국의 지식사회 진입을 가능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칭송했던 제대군인원호법이 성공했던 요인은 바로 책이었던 셈이다. 전쟁 직후 미국 출판시장에서 양장본(hard copy)보다 페이퍼백(soft copy) 판매가 많아진 것도 진중문고의 영향이다.

병사들에게 책을 보낼 때 일각에서는 검열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개진했으나 ‘정치적 검열은 미국에서 설자리가 없는 파시즘이나 쓸 방책’이라며 일축 당했다. 한국에서도 1978년부터 진중문고 사업이 시작됐으나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걸핏하면 ‘불온서적’으로 찍어 반입을 금지하는 사실상의 금서 제도를 적용하는 구태가 반복되고 있다. 군대뿐 아니다. 교과서를 획일화하고 문화예술계를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금서의 연장선이 다름없던 행태는 정권의 몰락으로 일단 사라졌다. 비록 성가시게 느껴지는 여론과 출판물이라도 억지로 통제하거나 금지하려는 자의 말로는 비참하다. 하루 앞으로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나선 후보들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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