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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관세법’, 피를 부르다





‘연방군은 찰스턴으로 진격을 준비하라.’ 앤드류 잭슨 미국 대통령이 군대에 내린 명령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연방 탈퇴 선언에 대한 강경 대응책. 잭슨 대통령은 ‘국가 파괴 행위를 막겠다’고 별렀다. 이때가 1832년. 충돌 위기는 대화를 통해 가라앉았지만 뒤끝이 있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불만은 남부 전체로 번지고 결국 1861년 남북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남부와 북부의 전쟁은 이미 30여 년 전에 서곡이 울렸던 셈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는 왜 연방에서 떨어지려고 했을까. 세금과 피해 의식 탓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뿐 아니라 남부의 여러 주의 생각이 같았다. 연방의 관세 체계가 남부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한다고 여겼다. 특히 1828년 5월 19일 하원을 통과한 연방 관세법에 대한 불만이 컸다. 찬성 105 대 반대 94로 간신히 통과된 이 법의 골자는 보호무역을 위한 고율 관세. 수입품에 적용하는 관세율을 62%까지 올렸다. 그렇지 않아도 영국(33%), 프랑스(24%)보다 훨씬 높은 40%대의 관세가 뛰자 남부의 불만은 더 끓어올랐다. 고율 관세로 인한 보호무역의 혜택은 북부 제조업체가 독점하는 반면 무역 보복의 피해는 농작물을 주로 수출하는 남부가 뒤집어써야 했기 때문이다.

남부 소비자들도 상대적으로 손해 봤다. 질 좋은 유럽산 제품의 가격이 더욱 올라 어쩔 수 없이 북부가 생산한 ‘조악한 공산품을 비싼 가격에 구매하는 구조’가 자리 잡았다. 남부는 자신들이 북부에 보조금을 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관세법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출신으로 미국 10·11대 부통령(1825~32)을 지낸 존 칼훈(John Calhoun)은 “관세 수입의 3분의 2가 남부에 부과된다“라며 “모든 게 ‘증오의 관세법(Tariff of Abominations)’ 탓”이라고 말했다.

칼훈의 불만은 사실일까. 그렇다. 연방 관세 수입에 대한 남부의 기여는 3분의 2보다 컸다. 1791년에서 1845년까지 남부 노예주들이 낸 관세는 7억 1,100만 달러. 같은 기간 중 북부 자유주가 낸 관세는 2억 1,000만 달러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지출은 북부에 몰렸다. 운하와 도로 등 교통 인프라 구축이 한창이던 시절, 북부가 받아 가는 예산이 남부보다 훨씬 많았다. 남부는 국가 세금의 3분의 2 이상을 내고서도 연방 예산은 9분의 1만 받아 간 꼴이다. 당연히 불만이 많을 수밖에.

남부의 대지주인 에드먼드 루핀(Edmund Ruffin)의 말의 들어보자. “연방의 관세가 없었더라면 남부는 지금보다 두 배 이상 부자가 됐을 것이다.” 루핀은 남북전쟁의 위기 속에 남부가 동원령을 내리자 67세 나이에 자원입대해 섬터 요새를 지키는 연방군(북군)을 향해 대포를 처음 발사한 사람이다(그는 남부가 패전하자 자살로 생을 마쳤다). 남북전쟁 발발 11년 전 사망한 칼훈은 생전에 “연방 세관을 없애고, 남부에서 거둬들인 재원을 남부에서 쓰게 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번영한 사람들이 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주가 1832년 연방을 탈퇴하겠다고 나선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관세로 인한 1832년 연방의 분열 위기는 ‘관세법의 틀은 유지하되 세율은 점차 내린다’는 절충점을 찾으며 가라앉았다. 서부와 남부의 지지를 받던 앤드류 잭슨 대통령은 약속대로 관세를 점차 인하, 절반 수준까지 끌어내렸다. 잭슨 대통령 이후에도 남부에 동정적인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며 관세는 20%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비약적인 경제 성장 덕분에 관세율을 내려도 연방 예산을 충당해 가던 미국은 1857년 공황을 맞아 관세를 더욱 내렸다. 1861년 초 평균 관세율은 14.21%. 민주당 의원들이 북부가 요구하는 노예 폐지 주장을 지렛대 삼아 관세를 지속적으로 내린 결과다.

남부는 편했으나 북부에서는 불만이 들끓었다. 관세율이 내려가니 관세 수입이 적어지고 연방 정부의 기업에 대한 보조금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북부 제조업체들의 지지 속에 버몬트주 출신 저스틴 모릴(Justin Morrill)의원은 1857년 새로운 관세법을 발의하고 나섰다. 관세를 최고 두 배 인상한다는 이 법안은 의회에서 논란을 야기하는 우여곡절 끝에 1861년 3월 의회의 벽을 넘었다. 고율 관세 시대로 복귀하는 이정표였던 모릴 관세법 발효 한 달 열흘 뒤 전쟁이 터졌다. 4년 동안 최소한 78만 5,000여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고 남부를 잿더미로 만든 남북전쟁의 원인에는 돈을 둘러싼 갈등과 증오가 깔려 있었던 것이다.

돈에 대한 미국인들의 집착이 오늘날이라고 다를까. 러시아에서 돈을 받았는지 아닌지 의심받는 로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난사하는 폭탄 발언의 탄착점도 결국은 돈에 쏠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재협상해야 하고 밀실에서 결정된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비용까지 부담하란다. 원칙도, 명분도 없는 막가파식 강요가 겁나고 걱정된다. 불신은 증오로 이어지기 십상이기에. /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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