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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엑스재팬 덕후였던 그녀, '공간의 유통'에 뛰어 들다

정수현 앤스페이스 대표

정수현 앤스페이스 대표




중고등학교 시절 엑스재팬 등 J팝(일본 팝 문화)에 꽂혀 왕성하게 온라인 팬클럽 활동을 했다. 그 시절 익힌 웹 기술은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는 데 든든한 자산이 된다. 사회에 나와선 청어람아카데미,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비영리단체에 몸을 담그며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역세권 유휴 공간이 비싼 임대료 탓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후엔 사무 공간 공유 플랫폼을 운영하면서 ‘공간의 유통’이라는 새로운 개념의 사업에 뛰어든다. 시공간에 가치를 부여하며 스타트업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스페이스클라우드를 이끄는 정수현(33·사진) 대표의 삶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장, 부반장은 도맡아 했고, 학급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사고에 ‘해결사’ 노릇을 자처했다.

“어쩌다 반장으로 선출되지 못해도 제가 꼭 맡아서 했던 일이 있었는데 바로 ‘학급 서기’였어요. 학급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일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지금도 일기든, 회사 관련 일지든 뭔가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걸 좋아해요. 말 그대로 데일리 콘텐츠에 집착하는 편이죠. 선생님의 신임을 받으려면 기록을 잘 남기는 게, 특히 구체적으로 꼼꼼하게 기록을 남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도 그때 몸으로 터득했구요.”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엔 선도부 활동을 했다. 의리도 있고, 리더십도 있으니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높았다. 그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던 비결 중 하나는 한 발 앞선 연예계 정보였다. 학예회 때 친구들과 팀을 꾸려 영턱스클럽이나 H.O.T 댄스를 따라 하기도 했고 혈액형별 성격 분석 차트를 만들어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의 성격을 분석하고 상담을 자청해 탄성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에게 가장 큰 즐거움은 J팝(일본 팝 문화)를 수집하는 것이었다. 특히 1990년대 중후반 엄청난 인기를 몰고 왔던 엑스재팬에 심취했는데, 엑스재팬의 곡을 쫙 꿰는 것은 물론 일본 내 엑스재팬 팬클럽 홈페이지에 들어가 인기 영상을 자신의 홈페이지 ‘써니데이즈’에 링크를 걸어 놓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당시 PC통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될 때였는데, 팬클럽 활동도 온라인에서 이뤄졌거든요. 포토샵이나 플래시, HTML 등 웹 기술을 독학으로 익혀 엑스재팬의 프로모션 활동을 열정적으로 했던 거죠.”

2000년 초반에는 국제 전화비가 엄청나게 나와서 부모님께 혼이 나기도 했다. 야후재팬에 매일 접속해 엑스재팬이나 스피드(걸그룹), 우타다 히카루(싱어송라이터) 등 인기 연예인의 정보를 수집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J팝을 동경했고, 또래 집단에 이런 문화를 전파하면서 묘한 희열을 느꼈다.

“포토샵을 배운 것도 이유가 단 하나에요. 제가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진이랑 제 사진을 합성해야 하는데 포토샵으로 했던 거죠. 엑스재팬의 리더인 요시키나 영국의 4인조 남성그룹 ‘웨스트라이프’의 메인 보컬인 마크 필리의 사진을 다운 받아 제 사진이랑 합성하는 거죠.”

한동대 재학시절 선후배들과 함께 있는 정수현 대표의 모습.


또래 친구처럼 평범하게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던 정 대표는 기독교 대학인 한동대 03학번으로 입학하며 새로운 세계에 발을 내딛는다.

경북 포항에 자리한 한동대는 1995년 설립됐기에 정 대표가 입학했을 때 설립 10년이 채 안 된 신생 대학이었다. 당시 학교나 학생들의 가장 큰 과제는 ‘학교 이름 알리기’였다.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걸 좋아했던 정 대표는 학교 홍보 동아리인 ‘나누미’ 9기로 들어갔고, 대학의 설립 취지나 교육 철학 등을 다양한 콘텐츠로 만들어 전국 고등학교를 찾아 다니며 홍보하는 일에 주력했다. 그녀가 합류하기 전까지 홈페이지도 제대로 갖춰 있지 않은 상태라 고등학교 때 익힌 웹 기술을 맘껏 발휘하며 공식 홍보 페이지도 만들었다.

“당시에 전교생이 3,000여명 수준이었어요. 포항에서도 산 속에 자리하고 있어서 시내에 나오려면 30분 정도 버스를 타야 했죠. 하루 종일 같은 공간에 있다 보니 학교 자체가 하나의 커뮤니티 느낌이 강했고, 그런 공동체 생활이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저한테도 딱 맞았던 거죠.”

학교 홍보단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학생들을 접했고 그녀 스스로 한동대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자신의 역할이 커지는 게 만족스러웠다. 3학년 때부터는 총학생회장이 되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고, 총학 선거에 뛰어 들었다.

“기독교 세계관을 바탕으로 메이저리그 문화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습니다. 핸드폰에 입력된 학교 친구나 선배 번호만 1,000명이 넘었으니 나만큼 이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은 후보는 없을 거라 자신했죠. 2학년부터 출마가 가능해 세 번 출마했는데 내리 낙방하고 나니까 제 자신이 다시 보이더군요. 스스로의 부족한 부분을 찾아가면서 고민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보니까 핸드폰에 수록된 친구 중에 비신앙인이 없더군요. 내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과만 교류했고, 이들과의 커뮤니티가 세상의 전부인 줄 착각했던 거죠. 당시 엄청나게 충격 받았어요. 내가 안정적으로 여기고 내가 편한 리그 안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었지만 그 밖으로 벗어나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리그 밖의 세상에 둔감했다는 당시의 반성은 이후 제 세계관 자체를 바꾸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그때가 2007년 초였다. 졸업을 1년 미룬 정 대표는 그 때부터 어떻게 살아갈 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세상을 바꾼다고 외쳤지만, 스스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자성 속에서 남은 1년을 학교 안의 성서한국이란 곳에서 활동했다. 일종의 사회실천학적 기독교 커뮤니티로, 이 곳에서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을 추천 받아 읽게 된다. 130여년 전 쓰여진 책은 자본주의가 일궈온 엄청난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왜 수많은 대중이 처참한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 파고들어갔다. 풍요 속의 빈곤은 인간의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 때문이며, 그것은 바로 소득불평등과 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이라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어쩌면 이때부터 정 대표의 머릿속에는 ‘건강한 공간 유통’이란 개념이 잡히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성서적 경제학을 접하면서 땅의 가치를 사회와 공유할 수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며 “그 동안 나만의 성벽에 갇혀 있던 시간을 반성하면서 졸업 이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이라고 고백한다.

깊은 고민의 시간을 가진 후 그는 비영리단체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부모님이 당황스러워하긴 했지만 정말 하고 싶은 일이냐고 묻고는 이내 허락했다.

그가 첫 발을 내디딘 곳은 청어람아카데미였다. 높은뜻숭의교회(지금의 ‘높은뜻연합선교회’)에서 운영하는 인재양성기관이다. 김동호 목사가 개척한 높은뜻숭의교회는 2001년부터 숭의여대 소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봤다. 출석 교인 수가 5,000명을 넘어서면서 교회 건축의 필요성이 생기자 2007년 숭의여대를 떠나 높은뜻푸른교회, 높은뜻정의교회, 높은뜻광성교회, 높은뜻하늘교회로 분리하는 파격적인 실험을 단행했다. 이 교회들은 모두 학교 강당 등을 예배당으로 빌려 쓴다. 높은뜻연합선교회는 예배당 대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다는 기치를 내걸고 있다. 2007년 이후에는 성전 건축 기금으로 마련한 200억원을 빈민 자활, 인재 양성, 통일 준비의 기둥을 세우는 데 썼다. 대표적인 인재 양성 기관인 청어람아카데미는 인문·사회·문화예술·신학 등 다양한 대중강좌로 널리 알려졌다.

정 대표는 2008년부터 4년간 청어람아카데미 간사로 활동하면서 아카데미 관리 업무와 공간 대여 등의 살림을 도맡아 했다. 주로 명동청어람을 맡아 지하 대형홀을 비롯해 6개의 세미나실을 필요한 단체에 공유해주는 일을 했다.

“보통 교회에서 운영하면 기독교인에게만 빌려주는 방식이지만, 청어람은 비신앙인에게도 빌려줬습니다. 건강한 사회단체라면 무료로 공간을 빌려드린 거죠. 여성 간사 혼자서 6층짜리 건물을 관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제 인생에서 그 4년은 정말 의미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매일 다양한 세미나가 열리는 만큼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 사회에서 공유되는 좋은 콘텐츠를 접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고 할 수 있지요. 대학 시절 경험하지 못한 사회적인 이슈에 맞닥뜨리면서 저 자신은 청어람에서 대학을 한번 더 다닌 느낌이었습니다.”

청어람아카데미를 나온 후에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단체에서 활동했다. 입시 사교육 중심에서 바람직한 진로 중심의 교육 정책을 만들어가자는 취지를 내건 단체였다. 정 대표는 대학이 대학답게 자리잡을 수 있는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시작으로 청년들이 대학 졸업장 없이도 사회에 진출하고,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대해 파고 들었다. 자연스럽게 청년 창업이라는 주제에 닿게 됐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물리적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술을 개발하든, 팀을 꾸려 아이템을 발전시켜 나가든 중요한 것은 팀원들과 함께 사업의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웬만한 역세권 임대료는 턱없이 비싸 청년 창업가들에게는 ‘보기 좋은 떡’일 뿐이었다.

“청어람에서 활동하면서 무료로 공간을 임대해줬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코워킹 스페이스를 확보하면 스타트업들이 초기 사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거죠.”

실제로 2012년 당시 그녀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전세계적으로 2,000여개의 코워킹 스페이스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는 10개 이내에 불과했다.

정 대표는 “어차피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들어갈 수 있는 자리는 얼마 안 되지 않느냐”며 “청년 창업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한정된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가 늘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20대 정수현 대표는 청어람아카데미에서 사회적 활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임팩트허브의 사례가 머릿속을 스쳤다고 말한다. 지난 2005년 영국 런던에서 문을 연 ‘임팩트허브’는 전 세계 63곳에 ‘허브’를 두고 1만1,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사회적 기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들었으며, 월 회비를 내면 전세계 임팩트허브 체인 어느 곳에서나 일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멤버십으로 회비만 내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당시 임팩트허브의 회비는 월 20만원 수준. 아직 특별한 벌이가 없는 청년들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액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워킹 스페이스의 1차 타깃으로 생각한 1인 기업이나 크리에이터, 작가, 예비 창업가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회비만 받고 운영할 수 있는 공간이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한 고민을 안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혹은 공개적인 행사 자리에 그녀는 자신이 그리는 코워킹 스페이스 모델을 설명했다. 어떤 이는 시큰둥했고, 또 어떤 이는 이해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힘들 거라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가 우연히 치과 의사 한 명과 연이 닿게 됐다.

북창동에 4층짜리 건물을 임차해 2층은 치과로 운영할 계획인데 나머지 공간을 어떻게 쓸지 계획이 없다며 그녀에게 맡아서 해줄 수 없냐고 제안했다. 뜻밖의 제안이었지만 그녀로서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광화문 인근이라는 초역세권에 자리잡은 데다 3층과 4층의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는 것도 매력적이었다.

노아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노아의 방주에서 착안해 크리에이터를 위한 방주 같은 곳이 되자는 취지를 내걸었다. 코워킹 스페이스의 브랜드도 ‘스페이스 노아’로 지었다. 2012년 12월 노아의 방주에 올라탔다.

“월 회비는 10만원으로 책정했어요. 월 평균 임대료로 20만원 이상 쓸 수 없는 청년을 이행기 청년이라고 하는데, 저희는 이들을 타깃으로 했습니다. 자신의 진로를 결정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놓인 청년, 현재 일정한 수입이 없는 불안정한 상태인 만큼 월 임차료 부담을 최대한 낮춰야 했습니다.”

정수현 대표는 청년을 위한 공간을 표방한 ‘무중력지대’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기획자로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한다.


얼마 안 가 입소문이 나면서 같은 시간대에 30~40명의 청년이 모일 정도로 북적거렸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성장했지만 이내 친해졌고, 네트워킹을 했고, 같이 창업에 나서는 청년들도 눈에 띄었다. 정 대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뿌듯했다.

하지만 이들로부터 받는 월세로 임대료는 해결됐지만, 인건비 등이 전혀 보전되지 않았다. 그녀는 저녁 시간대나 주말 등 사용자가 없는 시간대에 맞춰 대관 비즈니스를 하기 시작했다. 청어람아카데미에서 익힌 미디어 교육을 병행하면서 운영비를 보전했고, 공실 없이 대관이 이뤄질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동그라미재단에서 진행하는 공간 나눔 사업인 ‘오픈콘텐츠랩’을 진행했고, 서울시와 손잡고 ‘청년공간 무중력지대 대방동 프로젝트’도 정 대표의 손을 거쳐 탄생했다. 무중력지대 대방동은 100평이 채 안 된 작은 공간이었는데, 개관 1년 만에 회원이 2,000명을 넘으며 대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처럼 공유 공간이라는 가치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사업에 참여하면서 노하우를 쌓아갔다. 그렇듯 2013년 12월까지 미친 듯이 일했고, 진심으로 행복했다.

공간을 활용한 비즈니스에 눈을 뜬 그녀는 2014년 1월 앤스페이스라는 이름으로 창업에 나섰다. N개의 공간을 연결하겠다는 의미를 담았다. 8월에는 소셜 벤처 투자 기관인 소풍으로부터 3,000만원을 투자 받고 본격적인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 홈페이지는 물론 애플리케이션까지 가능한 개발자를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주도에 우리가 원하는 스펙을 갖춘 개발자가 있다고 듣고 수소문 끝에 찾아갔어요. 그땐 회사가 초창기 단계에서 출장 일정을 겨우 내서 내려갔던 거죠.”

몇 시간 동안 입에 침이 마르도록 회사의 비전과 개발자에게 제공할 수 있는 혜택 등을 설명한 후 답변을 기다리기로 하고 김포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지만 비행기 좌석에 앉자마자 문자가 왔다. 자신이 하기 어려운 일 같다고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나타낸 것이다.

밤 비행기를 타고 올라오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렀다. 없는 살림에 출장비를 들여서 내려 왔는데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가는 게 안타까웠다. 더 나아가 이 서비스를 세상이 필요로 하지 않는가라는 자괴감까지 밀려왔다. 적당한 개발자를 못 찾자 임준우 소풍 대표가 다음 개발자 출신의 벤처기업인 UFO팩토리를 소개해 줬다. N스페이스가 감당할 수 있는 예산에 맞춰 프로토타입(시제품) 개발에 들어갔다. 몇 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이듬해인 2015년 2월 블로그 형태의 프로토타입을 선보일 수 있었다. 홈페이지 이름은 공간의 유휴 시간을 공유하도록 돕는다는 의미에서 ‘스페이스클라우드’(http://spacecloud.kr)라고 지었다.

당시 500~600개의 공간이 등록돼 있는 상태에서 서비스가 제공됐는데, 그 무엇보다 결제 시스템을 붙이는 게 급선무였다. 급한 대로 초급 수준의 결제 시스템을 붙였지만, 고객들의 편의성은 떨어졌다.

정 대표는 결제 시스템을 어떻게 하면 고도화할 수 있을지 머리를 쥐어 짜며 고민했다. 그러다 네이버페이를 활용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2015년 7월 지금은 네이버 대표가 된 한성숙 서비스총괄부사장을 찾아갔다.

“저희 기획서를 가져가 열심히 설명했어요. 다행히 한 대표가 공유 공간이란 콘셉트에 깊은 관심을 가져주셨어요. 저희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네이버는 갖고 있으니 청년들을 위한 공유 공간을 위해 도와달라고 절실히 부탁했어요. 그런 간절함이 통했는지 한 대표가 정책적으로 지원해주기로 했고, 여러 개발팀이 저희 시스템 업그레이드 작업에 참여해줬어요. 저희 서비스의 가치를 좋게 보셨는지 나중에는 네이버가 17억원의 투자를 진행하며 4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는 2대 주주가 됐지요.”

지난 해 1월부터 4월까지 3개월간 네이버와 함께 전면적인 서비스 개발 작업을 벌였다. 2015년 말 개편 안내를 하면서 확인한 호스트(공간 사업자)가 1,000명, 하지만 개발이 끝나고 다시 연락했을 땐 650명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그만큼 자영업이 유지하기 힘들다는 반증이라며 정 대표는 안타까워했다.

스페이스클라우드는 다양한 콘셉트의 모임 공간을 갖추고 공간이 필요한 사람과 공간이 남아도는 호스트를 연결하면서 ‘공간의 공유 가치’를 실천하고 있다.


현재 전국적으로 3,500여팀의 호스트, 이 중에서도 서울 등 수도권은 3,000팀에 달하고 주로 합정, 홍대, 종로, 광화문, 여의도 등 역세권에 자리하고 있다. 유통 공간은 8,000곳에 달한다. 창업 초기보다 공간은 5배 늘었고 매출은 10배 뛰었다. 지난 해 15억원의 거래액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40억원을 목표로 하고 있다. 수수료가 10% 수준인 만큼 실질적인 수입은 크지 않지만 거래액이 커지면서 회사도 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정 대표는 공간 공유 사업에 사명감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지면서 공실률이 높아지는 사회에요. (공간이) 쓸모 없어서가 아니라 시장의 수요를 반영하지 못한 건물이 많아서 벌어지는 비극이죠. 그런 공간들을 방치하지 않고 공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제공하는 플랫폼이 되려는 게 ‘스페이스클라우드’의 지향점입니다. 건물주는 서비스를 개발해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하고 공간을 필요로 하는 분들은 공간이 없어 걱정하지 않도록 저희가 브릿지 역할을 하는 거죠. 공간을 갖고 새로운 콘셉트의 부동산 서비스를 만들어 모두가 윈?윈할 수 있는 건강한 공간의 유통을 만드는 것, 공간 걱정 없이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제 꿈인 거죠.”

그렇다면 왜 굳이 공간일까. 그녀는 공간이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한다.

“시장경제 안에서 공간을 기계적인 방식으로 배분하는 게 아니라 실제 수요에 맞게 공간을 쓸 수 있도록 매칭하는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바로 유통 플랫폼의 역할이기도 하구요.”

창업가로서 그녀가 사업에, 혹은 세상에 임하는 자세를 물었다.

“사업을 하면서 저보다 많은 사회적 기반 및 자산을 가진 분들을 만났고, 이분들의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아 꿈을 이룰 수 있는 툴(tool)과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사업은 무엇인가를 이루겠다는 목표가 건강하고 긍정적일수록 더 많은 배려와 이해가 따르는 것 같아요. 아마도 ‘진정성’의 힘이 아닐까요. 사회를 긍정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출사표를 던지십시오. 자신의 재능과 선한 의지를 우리 사회가 필요로 하는 곳에 쓰다 보면 좋은 방향으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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