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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_창업을_응원해] 필리핀에서 떡볶이 팔던 그녀, 외식 브랜드 컨설팅하게 된 사연

안태양 서울시스터즈 대표

안태양 서울시스터즈 대표




아버지가 여러 번 사업에 실패했다. 어린 시절 집 안 살림 곳곳에 붙은 빨간 딱지는 오래도록 기억의 한 구석을 자리했다. 대학 재학 중에 어딘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고 단돈 300만원을 손에 쥐고 필리핀 행 비행기에 올랐다. 생활비가 저렴하지만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게 필리핀을 택한 유일한 이유였다. 우연치 않게 야시장에서 떡볶이 장사를 했고, 거듭된 실패에도 버틴 끝에 ‘서울시스터즈’란 브랜드로 야시장을 석권했다. 음식 장사에도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화교 밑에서 사업을 제대로 배웠다. 지금은 서울의 맛집, 서울의 먹거리를 해외에 소개하는 외식 브랜드 컨설팅 사업을 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핸드볼 선수가 꿈이었던 소녀



안태양(32) 서울시스터즈 대표는 한국인 출신으로 필리핀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유명하다. 한인 사업가 대부분이 필리핀만큼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던 터라 그녀의 성공은 더욱 눈길을 끈다.

1980년대 아버지는 핸드폰 안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인 키패드를 개발했다. 당시 핸드폰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개발비와 금형비를 감당하면서 실패를 거듭했다. 안 대표는 “다들 삐삐(무선호출기)를 사용하던 시기에 핸드폰을 얘기하니 당연히 사업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회고한다. 어린 시절 집에는 빨간 딱지가 종종 붙었고, 사채업자들이 집에 몰려와 어머니를 괴롭히던 장면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

안태양 대표의 첫 돌을 기념해 아버지, 어머니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고생 끝에 낙이 왔다. 1990년대 들어서는 핸드폰 시장이 열렸고, 노키아·모토롤라·팬택 등에 납품하면서 부친의 사업도 성장 궤도에 올라섰다.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아버지 사업은 승승장구하며 가족의 삶도 풍요로웠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쯤 핸드폰 ‘걸리버’ 광고가 TV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이에요. 그 전에는 핸드폰이라는 것을 말해도 알아 듣는 친구가 없었는데, 걸리버가 나오니까 애들한테 아버지 사업을 설명하기 쉽더군요. 뭔가 새롭고 남들은 못하는 일이기에 아버지가 무척 자랑스러웠지요.”

어머니는 두 딸을 진취적으로 키우고 싶어했다. 안 대표의 첫 해외 여행은 초등학교 4학년 때 다녀왔던 대만 연수였다. 다니던 컴퓨터학원에서 대만에서 진행할 연수 프로그램을 소개하자 어머니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두 딸을 여행에 합류시켰다. 이후에는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면서 중국이나 일본을 다녀왔을 정도로 종종 해외에 나갔다.

안태양 자매가 부모님과 함께 일출 여행을 떠났던 시절의 행복한 풍경이다.


초등학생 안태양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핸드볼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160㎝를 넘는 큰 키를 자랑했고, 지구력도 좋아 실업고등학교 핸드볼 선수 언니들과 시합을 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핸드볼 선수로의 진로를 꿈꾸던 그녀에게 좌절의 순간이 다가왔다. 초등학교 5학년 말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간 것. 병원에서는 무리한 운동이 원인이라며 운동을 계속하면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진단을 내렸다. 어머니는 더 이상 핸드볼을 하면 안 된다며 아예 학교까지 옮겼다.

“핸드볼을 하는 몇 년 동안 언니 선수들이 경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품었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사라졌던 거죠. 12살짜리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쉽지 않은 포기였던 것 같아요.”

삶의 방향을 잃은 후 진학한 중학교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매일 운동하면서 몸으로 소통했던 터라 여자 친구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몰랐다.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손잡고 화장실에 가고, 점심을 함께 먹는 또래 문화가 낯설기만 했다. 어머니는 외로움을 느끼던 그에게 가야금을 사주셨고, 중학교 3년 동안 가야금은 안태양의 좋은 벗이었다.

그는 부천의 마지막 고입학력고사 세대였다. 중3 여름방학 전에 진학하고자 하는 고등학교에 입학 원서를 내려 했지만, 담임 교사가 완강히 사인을 거부했다. 그녀의 성적으로는 어림도 없다며 상고나 공고(지금의 특성화고)를 선택하라고 했다.

“하루는 어머니가 학교를 찾아와서 담임 선생님께 사정을 하셨어요. 제가 보는 앞에서 인문계를 써달라고 고개를 숙이고 간절하게 부탁하셨죠. 그래도 담임 선생님이 고집을 꺾지 않고 딸을 똑바로 키웠어야 한다고 훈계를 하셨어요. 어머니가 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너무 죄송했어요. 그때 결심했죠. 어떻게 해서든 어머니의 명예를 회복해 드리겠다구요.”

학력고사까지 딱 100일 남았던 때였다. 안 대표는 하루 3~4시간씩 잠을 자면서 공부에 매달렸다. 영어와 수학은 과외 선생님을 두고 집중적으로 파고 들었고, 이해가 안 되면 무조건 외웠다.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은 마음에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아집이 작용했다.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학력고사 점수로 전교 20등 안에 든 것이다. 진학하고자 하는 고등학교에서는 전화까지 왔다. 내신은 최하위권인데, 학력고사 점수가 너무 높다며 직접 확인 전화까지 온 것이다.

동생 안찬양과 함께 대만으로 컴퓨터 학원 연수를 떠났던 때의 모습. 생애 첫 해외 여행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입학한 후에는 공부가 쉬웠다. 2학년 때까지는 반에서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수시모집으로 대학에 진학하기 충분한 성적이었다. 수능 준비는 안 하고 내신에만 신경을 썼다. 그러던 중 인생의 위기가 닥쳐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공부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 고3때 일이었다. 중간고사를 완전히 망쳤다. 설상가상 그녀가 목표로 했던 주요 대학들이 수시 1학기 지원 명단에서 수시 2학기로 옮겼다. 수시 2학기에 지원하려면 고1~2년도 성적은 물론 고3 중간고사 성적과 수능 성적까지 포함됐다. 목표로 했던 대학을 포기하면서 1학기 지원이 가능했던 서울여대 경영경제학과를 선택했다. 입학이 확정된 후엔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다.

“동네에서 과외 아르바이트를 구하긴 했는데 여동생까지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어요. 식당에서 접시닦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전단지도 돌렸어요.”

◇계속된 알바천국에 지쳐 필리핀으로 떠나다



‘아르바이트 천국(?)’은 대학까지 이어졌다. 친구들은 씀씀이가 컸지만, 안 대표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대학 2학년 말엔 지칠 대로 지쳤다. 아무리 일해도 손에 쥐는 돈은 쥐꼬리만하고,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개미지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이때 필리핀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주변 친구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모습을 부러워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러던 중 필리핀은 영어를 배울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비행기 티켓 가격도 싸고, 생활비도 적게 든다는 정보를 얻었다. 아르바이트로 악착같이 모은 300만원을 들고 필리핀으로 향했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이국에서의 낯선 생활,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켰다.

하지만 필리핀 생활이 녹록하진 않았다. 3평 크기의 고시원 같은 방에 들어가 최소한의 생활비로 살았다. 통신비 부담에 핸드폰은 꿈도 꾸지 못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꿈 같은 유학 생활은 절대 아니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친구도 없었고, 스트레스를 풀 곳도 마땅치 않아 방에만 틀어 박힌 채 외톨이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갑자기 쓰러졌다. 다음 날인 성탄절에 눈을 떴을 때는 막막했다.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르겠구나 하는 진한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때가 2008년 12월 25일이었다.

그로부터 1년 동안 심각하게 미래를 고민했다. 이 상태로 한국에 돌아가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이미 나이가 25살이고, 3년이란 휴학기간도 아르바이트며 필리핀 연수로 소진해 버렸다. 졸업할 즈음엔 27살인데 제대로 취직을 할 수 있을지도 자신 없었다. 특별히 영어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고, 근근이 버텼던 과외 아르바이트는 경력을 인정 받을 수도 없었다. 사방이 막힌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필리핀에서 사업하는 한국인들을 생각했다. 딱히 머릿속에 필리핀에서 성공한 한국인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당수의 한인들이 필리핀에 사업하러 왔다가 망하고 돌아갔다는 얘기는 숱하게 들었다. 이곳에서 성공하고 돌아간다면 필리핀에서 성공한 1호 한국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필리핀에서 성공하면 나 밖에 없겠다. 필리핀에서 성공하면 한국에서 성공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경쟁 상대가 없는 나만의 필드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무슨 사업을 할까 아이템을 고민하다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카테고리로 나눠봤다. ‘인간 안태양’을 돌아보니 필리핀 친구들과 한국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면서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가장 행복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배추 100포기가 넘게 김장을 해서 이웃들에게 나눠주곤 하면서 정을 담뿍 담아 요리를 했던 어머니의 모습도 아련히 스쳤다. 음식에 대한 스토리텔링만큼은 아무리 해도 지치지 않을 정도로 먹는 것과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이걸 사업으로 연결하면 질리지 않고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여 실패해도 후회는 안 할 것 같았다. 때마침 한국의 음식점에서 셰프로 일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연락을 했다. 필리핀에 제대로 된 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여기 와서 같이 하자고 전격 제안했다. 동생은 부동산 회계를 전공했지만 어머니의 손맛을 닮아 취미 삼아 요리를 했고 요리학원까지 다니면서 솜씨를 익혔다.

◇자매가 함께 뛰어든 떡볶이 사업



동생이 들어오겠다고 약속하자 안 대표는 식당 자리부터 알아보러 다녔다. 처음에는 옆집 아주머니가 하던 베이커리 매장 자리가 나와 계약하려고 했다. 필리핀에서 이모처럼 따르던 지인이 한사코 말렸다. 필리핀은 권리금이 없어 임대료가 싸게 느껴지지만 6개월치 월세를 미리 내고 들어가야 하고 간판을 바꾸는 것 등등 세부적인 것까지 건물주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게 말리는 이유였다.

안태양(가운데) 대표가 야시장 매장을 찾은 손님들과 함께 활짝 웃고 있다.


설명을 듣고 보니 수중의 돈으로 구할 수 있는 가게 자리가 없었다. 한창 고민하던 그녀에게 필리핀 이모가 제안을 했다. 1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야시장에서 식당을 열면 어떠냐는 아이디어였다. 매주 금요일 밤 10시부터 토요일 오전 10시까지 여는 야시장으로, 당시 마닐라에서 야시장 ‘반체토(Banchetto)’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한 번에 5,000여명이 방문하는 대규모 야시장이었어요. 한 달에 한 번씩 계약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는데, 5,000명 중 10%만 우리 가게에 들러도 500명이라 생각하니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만 같았죠. 당시 한류에 대해서도 호감이 높아질 때라 한국 여자애들이 한국 음식을 팔면 독특한 아이템으로 주목을 받을 것만 같았죠.”



2010년 3월 첫 주 화요일 여동생이 필리핀에 도착했다. 동생은 언니의 말만 믿고 원룸 보증금까지 빼서 갖고 왔다. 둘의 돈을 합치니 600만원 정도가 됐다. 동생과 함께 지낼 집을 구하고, 요리에 필요한 집기를 샀다. 나머지는 모조리 음식 재료를 사는 데 썼다. 당연히 대박이 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도시락과 떡볶이를 메뉴로 정하고 100인분을 준비해서 야시장으로 향했다. 결과는 참혹했다. 아침까지 목이 터져라 장사를 했지만 결국 2인분을 파는 데 그쳤다. 첫날 매출은 5,000원. 자릿세 10만원에 비하면 매출이 턱없이 적었다. 보관할 냉장고가 없어 음식 재료를 고스란히 버려야 했다. 동생에게는 괜찮을 거라 말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목을 놓고 울었다. 예상치도 못한 실패였고, 내일이 오는 게 두려웠다. 당장 밥 사 먹을 돈도 없었다. 한국에서 잘 살고 있는 동생 인생까지 망친 것 같은 자책감에 시달렸다.

실컷 울고 나니까 이성을 찾을 수 있었다. 당장 굶어 죽을 수는 없었다. 과외 하는 집에서 선불로 과외비를 받기로 하고 급한 불부터 껐다. 그 다음 주 금요일이 돌아오자 수중에 가진 돈으로 재료를 사고 음식을 준비해서 야시장으로 향했다. 이때도 12시간 내내 소리를 지르면서 음식을 팔았지만 4인분 팔았다. 그 다음 주는 6인분, 그 다음 주는 10인분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매출이 늘었다. 그렇게 3개월이 지나갔고 어느 날 이런 생각이 스쳤다.

◇장사를 제대로 배우자



“내가 장사하는 걸 어디서 배웠지?” 생각해보니까 주변의 친척이나 지인 중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은 전혀 없이 텔레비전을 통해 장사를 봤던 것이다. 가게를 열면 손님들이 줄 서는 ‘대박’ 사업을 꿈꾸었다. 장사가 뭔지도 모르면서 뛰어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 서점에 들어가 ‘장사’를 검색어로 쳤다. 눈에 띄는 책 50권을 골라 엄마에게 리스트를 보냈다. 엄마가 국제 특송으로 보내준 50권의 책을 몇날 며칠 읽고 또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으면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괜찮은 내용이 있으면 실제 장사에 대입해 보기도 하고, 관련된 사람의 뉴스도 찾아보면서 장사를 파고 들었다.

안태양 대표가 브랜드 콘셉트를 통일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개발한 서울시스터즈의 메뉴판.


장사를 제대로 하려면 사람의 마음부터 얻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우선 주변 상인들의 마음을 얻기로 했다. 한국에서 온 젊은 여자애들이 손님들을 빼앗는다며 달갑지 않게 여기던 현지 상인들부터 고객으로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사를 마친 후 상인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면서 음식을 선물했다. 부족하지만 음식 맛을 평가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거리를 두고 대하던 동료 상인들이 차츰 마음을 열었고, 장사 노하우도 조금씩 알려줬다. 고객을 맞이하는 자세도 확 달라졌다. 그때까지는 힘들면 자신도 모르게 시무룩해지곤 했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손님을 맞이하는 얼굴만큼은 화사하게 웃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악착같이 실천했다.

디테일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자주 오는 손님의 인상 착의를 따로 메모해 두고, 이들이 주로 찾는 음식과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정보를 기록했다. 특히 당시 한류 붐이 거세게 불 때라 슈퍼주니어 등 한류 스타의 근황에 대한 정보를 얘기해 주면 단골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뒤로 물러날 데가 없었고, 이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어요. 여기서 실패하면 죽을 것 같다는 절박함이 있었던 거죠. 메뉴 구성도 철저하게 챙겨서 조금이라도 전과 맛이 다르면 여동생을 무섭게 혼냈어요. 반드시 해내야겠다는 목표 의식이 그 무엇보다 우선했던 것 같아요.”

야시장 오픈은 3월, 그로부터 6개월쯤 지나니까 장사가 제대로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시장은 현금 장사인데, 9월에는 현금을 색(등에 매는 가방)에 쑤셔 넣을 정도가 됐고 어떤 날에는 집에 돌아와 돈을 세지도 못하고 가방을 품에 안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당시 1호점과 2호점을 여동생과 나눠 운영하고 있었는데 10월경 3호점까지 내게 됐다. 이곳도 같은 메뉴의 음식을 팔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3호점은 손님이 별로 찾지 않았다. 1, 2호점의 월 평균 매출이 200만원을 넘는데 3호점만 절반도 되지 않은 것이다.

왜일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100퍼센트 맛도 메뉴도 똑같이 팔고 있는데 여긴 왜 안 될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3호점이 다른 점은 안태양 자매가 상주하지 않은 것, 그 하나뿐이었다.

이때 안 대표는 브랜드를 정립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앞으로 사업이 커지면 4호, 5호 등 계속 분점이 늘어날 텐데 모든 매장에 대표가 상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안태양이 없어도 브랜드 자체로 고객이 찾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판단했다. 브랜드 관련 책을 잔뜩 사서 읽기 시작했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확립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브랜드를 통일하자



콘셉트부터 고민했다. 한국 음식을 팔고 한국에서 온 자매가 운영하는 곳이다. 처음에는 뜨거운 시스터즈라는 의미에서 ‘핫시즈’라고 지었다. 그런데 음식을 사러 오는 게 아니라 전화번호를 따러 오는 남자 손님들이 많았다.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브랜드였다. 결국 한국을 대표하는 단어로 서울과 시스터즈를 합쳐 ‘서울시스터즈’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현지 디자이너를 고용해 안 대표 자매의 얼굴과 비슷한 캐릭터로 로고를 만들었다. 컬러감, 레시피, 로고송도 통일했다. 이런 작업을 거치고서야 3호점도 매출이 1, 2호점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랐다. 2011년까지 8호점이 나왔다. 승승장구하던 시절이었다. 인기가 높은 메뉴는 ‘레디투쿡(Ready to cook)’ 패키지로 만들어 배달 서비스도 했다. 매출이 껑충 뛰었다. 월 평균 매출이 1억원을 넘었다. 그녀가 꿈꾸던 그대로 ‘필리핀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반열에 올랐다.

안태양(왼쪽) 대표가 동생 찬양씨와 함께 서울시스터즈 로고 앞에서 활짝 웃고 있다.


“저희 가게가 잘 되자 야시장에도 저희처럼 떡볶이를 파는 가게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서울시스터즈’에만 사람들이 줄을 섰죠. 왜 떡볶이 하면 서울시스터즈를 떠올리게 됐을까 생각해보면 맛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서울 스타일’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면서 서울시스터즈라는 브랜드가 힘을 가진 거죠.”

이대로 장밋빛 인생이 펼쳐지는 듯 했다. 그러던 중 2013년 그녀에게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서울시스터즈의 명성이 높아지자 중국계 회사인 GNP트레이딩에서 인수를 제안한 것이다. GNP트레이딩은 하이네켄, 칭따오 등 유명한 브랜드 제품을 독점으로 필리핀에 유통하는 회사다.

처음에는 자신이 애써 가꾼 브랜드를 넘긴다는 것에 거부감부터 들었다. 구멍가게라도 내 사업을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화교인 조지 노콤 푸아(George N. Pua) 회장은 그녀를 세 번이나 찾아와 설득했다. “너를 보면 어릴 적 내 모습 같다. 내 밑에서 배우고 성공해라”라는 말은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스스로 성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던 때였다. 변화가 필요했다. 비즈니스가 뭔지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그녀는 ‘서울시스터즈’의 브랜드는 자신이 갖는 조건으로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GNP트레이딩 신사업개발본부장으로 들어갔다. 물론 여동생도 함께였다.

◇사업의 A부터 Z까지 배우다



“돌이켜보면 떡볶이 장사를 할 때보다 훨씬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았지만 제대로 배웠습니다. 회장님은 상대방과 미팅하는 법, 에티켓, 협상하는 방법, 브랜드 기획, 마케팅, 직원 관리, 세일즈의 방식, 돈 관리 등등 사업과 관한 모든 것을 세세하게 가르쳤어요. 정답을 주는 게 아니라 끊임 없이 질문을 던져 제가 답을 찾아가게끔 했지요. 혹독한 훈련법이었지만 제대로 저를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GNP 신사업개발본부장으로 일하면서 그가 론칭한 브랜드는 ‘K펍 비비큐’와 ‘오빠 치킨(OPPA CHICKEN)’이다. 월 평균 매출이 각각 2억~3억원, 1억원에 달하며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성공의 비결을 들어봤다.

“오빠 치킨은 생닭을 제외한 모든 재료를 한국에서 들여옵니다. 오빠 치킨에 입혔던 스토리가 ‘이게 진짜(리얼) 한국 치킨’이었어요. 우리나라 치킨 브랜드가 외국에서 크게 성공하지 못한 여러 이유 중 하나가 소스 때문이에요. 소스 재료의 70%가 물인데, 물이 비싼데다가 해외 배송하는 도중에 터지거나 상해서 마진 남기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현지 공장에서 소스를 만들면 마진이 크게 오를 텐데 그럼 맛이 좀 달라요. 사실 고객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잘 모를 수 있지만, 브랜드 정체성을 ‘리얼 한국 치킨’으로 잡았기 때문에 모든 걸 한국에서 공수해요. 대신 소스를 농축액이나 파우더 형태로 바꿔서 마진을 높일 수 있는 선택을 해 나가는 거죠.”

안태양 대표가 한국으로 돌아와 새롭게 시작한 서울시스터즈 먹방 영상. 안 대표는 한국의 대표 음식들을 해외에 알리는 플랫폼으로 ‘서울시스터즈’를 활용한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3년 반을 몸으로 부딪히면서 배우고 2016년 9월 GNP트레이딩을 나와 독립했다. 안 대표의 다음 행보는 외식 브랜드의 글로벌 진출을 돕는 컨설팅 사업이다. 이른바 푸드컬처디렉터로서 전문화된 외식 브랜드 컨설팅을 하겠다는 포부다.

“생애 첫 창업인 서울시스터즈도 그렇고, GNP트레이딩에서 론칭한 ‘K펍 비비큐’ 등 모두 한국의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 회사였어요.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한국 음식을 맛보고, 한국 문화를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서울에서 맛보는 음식과 파리나 마닐라에서 먹는 음식 맛이 같아야 하죠. 또한 그 공간의 분위기도 비슷해야 하구요. 우리 외식 업체들이 해외, 특히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는 데 전문적인 맞춤형 컨설팅을 하는 리브랜딩 작업을 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지구촌 어디에서나 외국인들도 자신의 집에서 한국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일종의 ‘쿡방’ 같은 플랫폼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녀는 창업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직장 생활부터 하라고 당부했다.

“우선 직장 생활을 꼭 해보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직장을 다녀보면 내가 만날 수 없는 인맥을 쌓을 수 있고, 작게는 보고서 작성하는 방법, 비즈니스 파트너 상대하는 방법 등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을 준비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허황되게 내가 하면 뭐든지 될 거라 생각하지 말고 차근차근 준비하세요. 저는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고 무작정 달려들었기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취업이든 창업이든 준비를 많이 하고 도전하세요. 사업이라는 게 기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준비를 많이 하는 것이 성공으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지요.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네요. 20대 젊은 분들이 사업하고 싶다고 할 때 상대방의 빛나는 모습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빛나는 모습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고생스러운 오늘, 웃음 뒤에 감춰진 그림자 같은 것도 같이 봐야 합니다. 빛나는 결과만 보고 꿈을 꾸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민정기자 jminj@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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