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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과 일본의 셈법…오데르-나이세





1950년 7월 6일, 폴란드와 동독이 국경 협정을 맺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츠 폴란드 총리와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총리가 서명한 협정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현존하는 국경을 확정하는 협정’. 줄여서 ‘평화와 우정의 국경협정’이라고 불렀다. 정작 이름과 달리 이 협정은 우정과 신뢰로 맺어지지 않았다. 폴란드는 반겼으나 동독은 소련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다. 동독 입장에서는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협정의 골자가 영토 할양이었기 때문이다. 국경 협정에 따라 자연 하천인 오데르 강과 나이세 강을 국경으로 확정함에 따라 동독의 영토는 11만 2,000㎢나 줄어들었다.



독일 입장에서 당장 손해는 아니었다. 이미 종전 직후부터 폴란드가 오데르-나이세선(Oder-Neisse Line)을 국경 삼아 왔으니까. 더욱이 동독 주민들은 언론 검열에 눌려 할 말을 못 했다. 그러나 서독에서는 국민감정이 들끓었다. ‘강제 점령당하고 있는 것도 억울한데 조약으로 확정한다니…. 동독 빨갱이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반응이 터져 나왔다. 그럴 만했다. 아무리 패전국이라도 역사적으로나 인구 분포로나 독일 영토가 확실한 땅이 넘어갔으니. 패전 직후 폴란드 당국에 쫓겨난 독일인들이 조직적인 시위까지 벌였다.

소련 등에 탄 폴란드에 의해 강제 추방된 독일인은 약 1,200만 명. 남한 면적보다 넓었던 오데르-나이세선 동쪽의 곡창 지대와 독일 제2위 공업단지에서 추방당했던 이들은 영구적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추방당한 독일인들은 실지 회복을 정강으로 내세운 ‘독일 난민당’이라는 정당까지 만들었다. 서독 아데나워 수상은 동독과 폴란드를 비난하면서도 양국의 협정을 국내외 정치에 제대로 써먹었다. 독일 난민당 출신을 각료로 뽑아 자신의 정치 기반을 넓히는 동시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강행(1955년)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아무리 패전국이라도 동독은 왜 폴란드에 남한 면적보다 넓은 땅을 빼앗기다시피 넘겨줬을까. 독일의 분할과 영토 할양은 이미 2차 세계대전 종전 무렵부터 밑그림이 그려졌다. ‘오데르-나이세선’ 국경이 처음으로 공식 논의된 자리는 1945년 2월의 얄타 회담. 스탈린은 이 자리에서 독일의 동쪽 국경에 관련해 두 가지 얘기를 꺼냈다. 첫째 폴란드 땅의 동쪽 영토 18만 7,000㎢를 소련에 넘겨주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 땅을 할양받기 위해 국경선을 오데르-나이세선으로 옮기자는 스탈린의 제의를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총리가 받아들였다.

독일 항복 뒤에 연합국들은 포츠담에 모여 이 방안을 다시 거론했다. 폴란드 영토를 소련에 내준다는 점에는 이의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소련이 독일과 폴란드를 분할하며 어차피 점령한 땅이었다. 소련은 새로 영토를 받는 것도 아니고 커슨 라인과 국경이 비슷했다. 커슨 라인이란 1919년 볼셰비키 러시아와 폴란드 전쟁 시 중재에 나섰던 영국 외무장관 조지 커슨이 제안한 폴란드-소련 간 국경선. 연고권을 주장하는 스탈린의 주장이 먹혔지만 오데르-나이세선을 국경으로 삼자는 논의는 논란이 많았다. 특히 소련을 동맹국이 아니라 새로운 적으로 간주했던 처칠 영국 총리가 반대하고 나섰다.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게 뻔한 폴란드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스탈린의 주장이 반대론을 눌렀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먼저 소련의 발언권이 셌다. 전쟁에서 희생이 가장 많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클랜츠 고든대 교수의 저서 ‘독·소전쟁사’에 따르면 약 1,349만 명에 이르는 2차 대전 독일군 사상자 가운데 1,076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소련도 2,900만~5,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피해가 컸던 소련은 독일의 전후 처리 문제에도 큰 목소리를 냈다. 둘째, 소련을 제어할 미국과 영국의 리더십이 사라졌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사망하고 처칠 수상은 포츠담 회담 도중 총선에서 패배하며 회의장을 떠났다. 결국 미국과 영국은 임시 분계선이라는 조건을 달아 오데르-나이세선을 받아들였다.

오데르-나이세선을 국경으로 확정한 동독과 폴란드 간 조약에 독일인들은 분노했으나 다른 국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군에게 당한 게 많아 ‘패전 독일을 작게 쪼개 농업국가로 만들자’고 제안(모겐소 방안)했던 프랑스는 동독과 폴란드 간 국경협정을 반겼다. 미국과 영국은 국경이 아니라 임시 분계선이라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서독 정부는 강경한 입장을 지켰다. 동독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며 동독과 수교한 국가와도 국교를 맺지 않는다는 할슈타인 원칙을 고수한 서독의 입장은 1960년 말부터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중도 좌파 정당인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집권하면서 동방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70년 12월 발생했다. 빌리 브란트 총리는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 추념비 앞에 참회의 무릎을 꿇어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줬다.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무릎 꿇기 사건 이틀 뒤 보다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 브란트 총리가 25년간 외교관계 단절 상태였던 폴란드와 국교를 회복하는 조약에 서명한 것. 서독·폴란드 조약에는 오데르-나이세선을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주요 외신은 유럽 최대의 영토 문제가 해결됐다고 타전했으나 독일은 들끓었다.





특히 오데르-나이세선의 동쪽 영토에 살다 추방당한 실향민들은 ‘브란트가 빨갱이들에게 독일의 영혼을 팔았다’며 맹공을 퍼부었다. 정치권도 가세했다. 1972년 4월 브란트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이 제출돼 불과 두 표 차이로 부결됐지만 연일 논란이 일었다. 야당은 예산안으로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브란트는 정치 위기를 국회 해산으로 넘겼다. 젊은 유권자들이 결집하며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퇴출의 위기에서 살아났다. 브란트를 지지하는 젊은 유권자와 여론에 당시 서독의 극우 단체들은 ‘그럴 거면 동독에 가서 살지, 왜 서독에서 사느냐?’고 비아냥거렸다.

브란트 총리가 물러난 뒤에도 독일은 정책의 일관성을 지켰다. 특히 반대 정파였던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성향이 달랐지만 브란트의 동방 정책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으며 독일 통일의 길을 열었다. 고비를 만날 때마다 콜 총리는 ‘통일 독일은 영토 욕심이 없다’면서 오데르-나이세선이 국경선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당시 독일이 통일까지 이르게 된 요인은 크게 세 가지가 작용했다. 첫째, 통일을 위해 영토를 양보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데르-나이세선의 재확인에서 통일이 앞당겨졌다. 둘째, 유럽 통합의 진전에 따라 굳이 민족국가의 영토 개념이 희박해졌다. 셋째, 국제 정세가 우호적으로 움직였다. 냉전 시절에는 소련과 위성국인 폴란드를 막기 위해 오데르-나이세선을 정식 국경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미국도 태도를 바꿨다.

만약 서독이 과거의 영토에 고집을 부렸다면 폴란드가 독일 통일에 찬성할 수 있었을까. 소련과 프랑스, 미국이 독일 통일을 달가워했을지 의문이다. 오데르-나이세선을 받아들이며, 즉 영토를 포기하며 독일은 오히려 실현 불가능한 것, 통일을 이룬 셈이다. 폴란드도 통독의 덕을 봤다. 통독 이후 폴란드와 교역이 크게 늘어 러시아를 제치고 구 동구권 국가 중에서는 독일과 무역액이 가장 많은 나라로 떠올랐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영역을 폴란드와 체코까지 확대하고 이젠 흑해까지 바라보고 있다.

독일이 통일을 이루고 미국의 영향력이 중앙아시아까지 확대하는 바탕에는 무엇보다 독일의 처절한 반성이 있다. 빌리 브란트가 무릎을 꿇고 영토까지 포기하며 오데르-나이세선을 받아들이며 독일은 오히려 더 많은 기회를 잡았다. 영토는 중요하다. 배진수 동북아역사재단 수석연구위원의 연구논문 ‘세계의 영토 분쟁의 흐름과 현황, 그리고 해결 방안(2012)’에 따르면 1648년부터 1987년까지 지구의 주요 전쟁 177건 가운데 영토 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149건으로 84%를 차지했다. 독일은 영토 문제를 자신의 처지에 맞도록 접근해 평화적으로 해결한 모범 사례로 꼽힌다.

고약한 사실은 독일과 정반대의 국가가 이웃에 있다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모든 영토 분쟁은 일본의 식민지 침탈 또는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와 관련이 깊다. 러시아와 일본 간 북방도서 문제는 2차 세계대전 종전 과정에서 불거졌다. 중국과 일본 간 조어도(센카쿠 열도) 분쟁 역시 청일전쟁이 남긴 후유증이다. 일본이 걸핏하면 주장하는 독도 영유권도 러일전쟁과 조선 침탈 과정에서 비롯됐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침략 전쟁을 반성하고 사죄하는 반면 영토 팽창과 침략 과정에서 손에 넣었던 땅을 다시 내놓으라고 강변하는 국가는 오로지 일본밖에 없다. 독일은 통일국가의 발원지 격인 프로이센의 고유 영토까지 내줬지만 일본은 빼앗았던 영토까지 제 땅이란다.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 독일은 자격이 있지만 일본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동독과 폴란드가 우정과 평화의 국경 조약을 맺던 1950년 7월, 사실 소련의 강권과 억지만 있었을 뿐 우정은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협정은 평화와 독일 통일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독일과 폴란드 간에 없었던 우정과 신뢰관계도 싹텄다. 유럽의 시한폭탄이라고 불렸던 오데르-나이세선은 이제 양보와 신뢰, 평화의 상징이다. 분쟁을 겪었던 독일과 폴란드는 역사 교과서를 공동으로 집필하고 갈등의 장소였던 오데르강과 나이세강에는 양국이 공동으로 운영하는 자연공원이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유럽 전체도 전쟁 위협에서 벗어났다.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낳았을까. 빨갱이라고 매도 받으면서도 미래를 위해 눈앞의 이익을 버린 독일인들의 역량과 슬기 덕분이다. 정당의 이익이나 목표보다 국익을 우선해 반대 정파의 정책이라도 과감하게 수용했던 독일의 정치인들과 그들을 가려낼 수 있던 독일 유권자의 선구안이 평화와 공존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낸 셈이다. 부럽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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