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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혁명은 명예로운가





영국의 ‘명예혁명’은 과연 명예로울까. 보수주의의 원조로 꼽히는 에드먼드 버크는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혁명’이라고 평가했지만 정반대의 시각도 있다. 프랑스 출신의 미국 역사가 바크 바전(Jacques Barzun·지난 2012년 104세로 타계)은 “명예혁명의 ‘명예’라는 명칭부터 부적합하다”고 주장한다. 바전의 명저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년, 서양문화사 500년’에 따르면 명예혁명은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펼치려던 제임스 2세에 대한 기득권자들의 반동과 쿠데타일 뿐이다. 무혈혁명 역시 사실과 다르다. 오렌지공 윌리엄(윌리엄 3세)이 네덜란드에서 데려온 군대는 아일랜드를 짓밟았다.

물론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는 명칭은 요지부동이다.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국왕 찰스 1세가 참수당하는 내전까지 겪었던 영국의 입장에서는 희생자가 상대적으로 적은 정권 교체였다. 특히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잉글랜드 바깥으로 눈을 돌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신교도인 윌리엄 3세와 가톨릭을 신봉하는 국왕 제임스 2세는 아일랜드에서 크게 맞붙었다. 1690년 7월 12일 아일랜드 동부 드라헤다 지방 보인 강(Boyne River)에서 사위인 윌리엄은 3만 5,000명 군사로 2만 1,000여 병력을 거느린 장인과 전투를 치렀다.

아일랜드 역사상 최대 규모로 치러진 전투의 결과는 윌리엄 3세의 압승. 5만 6,000여 양쪽 병력에서 나온 사망자가 약 2,000명. 다른 전쟁에 비해서는 많지 않았지만 사망자는 한쪽 편에서 주로 나왔다. 전사 4명 중 3명은 제임스 2세의 장병들이었다. 제임스 2세를 내세워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하려던 아일랜드의 꿈은 무참하게 깨졌다. 제임스 2세와 아일랜드 군대는 1년 뒤 오그림(Aughrim) 전투에서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1만 8,000여 병력으로 윌리엄 3세의 2만여 군대와 맞서 4,000명 사망에 3,000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혔다. 윌리엄 군대의 피해도 컸다. 전사 3,000여 명. 그래도 윌리엄 3세는 장인의 반발을 확실하게 누르고 아내 메리와 함께 공동국왕의 지위를 굳혔다.

반면 아일랜드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올리버 크롬웰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믿으며 제임스 2세에게 충성을 다했던 1만 4,000여 장병들은 고향을 등지고 용병으로 유럽 각지를 떠돌았다. 아일랜드는 급속하게 잉글랜드의 식민지로 변해갔다. 18세기가 시작될 무렵 아일랜드인이 소유한 토지는 전 국토의 7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영국의 농장주들은 아일랜드 농업과 경쟁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환금성 높은 작물의 재배를 교묘하게 방해했다. 아일랜드의 농지는 밀 대신 감자나 심는 땅으로 전락했다. 19세기 초중반 아일랜드를 휩쓴 감자 대기근이 바로 이 당시 잉태된 셈이다.

아일랜드인에게 희망을 앗아가 버린 두 전투는 문학작품에도 남아 있다.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20세기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는 1914년 발간된 단편집 ‘더블린사람들’의 첫 단편과 마지막 단편에 당시 전투의 날짜와 지명을 집어넣었다. 아일랜드 독립운동에 적극 나섰던 가톨릭 사제 ‘폴린 신부’가 죽는 날이 보인 강 전투 날짜와 같다. 제임스 조임스는 왜 124년 전 보인 강 전투를 기억해 소설에 등장시켰을까.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조이스 역시 보인 강 전투를 아일랜드 쇠망의 시작으로 여겼다.



보인 강 전투의 패배자는 더 있다. 국제전이었기 때문이다. 윌리엄의 군대는 네덜란드 근위대를 주축으로 프랑스 위그노(신교도), 잉글랜드 대대, 덴마크와 프로이센, 핀란드, 스위스 용병들이 참전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보낸 흑인 노예 200여 명도 전투를 치렀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 정규군과 아일랜드 현지 병력으로 구성된 제임스 1세의 군대는 교황과 스페인의 견제까지 받았다. 신교도 윌리엄 3세에게 왕위를 되찾으려는 구교도 제임스 2세의 대립 구도에 가톨릭국가인 스페인과 교황청이 신교도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간단하다. 날로 커지는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서다.

승리한 윌리엄 3세의 군대도 중장기적인 영향을 받았다. 윌리엄 3세는 잉글랜드가 해군을 맡고 네덜란드의 육군을 키워 루이 14세와 전쟁에 대비했다. 세계의 바다를 지배했던 네덜란드의 해군력이 약해지면서 네덜란드 역시 쇠망의 길을 걸었다. 반면 영국은 달랐다. 보인강 전투 이래 프랑스와 무려 다섯 차례 전쟁에서 네 번 이겼다. 9년 전쟁(아우크스부르크 동맹전쟁 1688~1697),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2~1714),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39~1748), 7년 전쟁(1756~1763), 미국 독립전쟁(1774~1783)으로 이어진 ‘전쟁 시리즈’에서 미국 독립전쟁만 빼고 모두 승리한 영국은 세계 최강자로 떠올랐다.

영국은 어떻게 3배의 인구, 2배의 경제 규모를 가진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에서 승리했을까. 돈, 돈 때문이다. ‘마지막 금화를 가진 자가 전쟁에서 이긴다’던 루이 14세의 말처럼 영국의 전비 조달 능력이 앞섰다. 무엇보다 잉글랜드은행의 역할이 컸다. 공동국왕 윌리엄 3세와 메리 여왕은 네덜란드에서 건너올 때 준비한 200만 길더가 고갈되자 상인과 은행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윌리엄 3세의 전쟁자금 마련을 위해 상인들이 내놓은 대책은 은행 창립. 1609년 설립된 암스테르담 은행을 거울삼아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세웠다. 잉글랜드은행은 세금을 거두지 않고 낮은 금리로 자금을 빌리는 기능을 해냈다.

윌리엄 3세는 증세와 복권, 국채 발행, 동인도회사 개혁뿐 아니라 네덜란드의 경험을 살려 재무성과 상무성 같은 조직도 만들었다. 영국의 금융·세제·행정 개혁은 윌리엄 부부가 네덜란드에서 건너올 때 함께 정착하거나 본사를 암스테르담에서 런던으로 옮긴 회사들의 선진기법과 경험이 작용한 것이지만, 불가능할 뻔했다.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의 저항을 넘지 못했다면, 영국의 성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영국이 누리는 명예에는 아일랜드의 눈물이 어려 있다.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ongw@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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