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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연극 '1945'] 저마다 지옥을 맛보았기에..더 진하게 꽃피운 인간애

광복에도 고향땅 돌아갈 수 없는

위안소 출신·아편쟁이·돌림병 등

만주로 흘러든 민초들의 삶 그려

절망 가득하지만 시종일관 유쾌

국립극단의 연극 ‘1945’ 첫 장면. 일본군 위안소에서 나온 미즈코(왼쪽, 배우 이애린)와 명숙(배우 김정민)이 각자의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다. 명숙은 만주로, 일본군의 아이를 갖게 된 미즈코는 아이 아버지의 고향인 시코쿠로 향하려 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200만명.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이 일으킨 ‘만주사변’으로 급조된 만주국이 1945년 붕괴되기 전까지 만주에 거주한 것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의 숫자다.

숫자 2에 0이 여섯개나 붙어, 손가락으로는 셀 수조차 없는 까마득한 숫자. 이렇게 어마어마한 숫자가 간판으로 내걸리면 비극이든 희극이든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생경해진다.

하지만 숫자를 대신해 고유명사가, 누군가의 이름이 따라 붙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숫자가 사라진 자리에 사람이 나타나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 가슴에 와 닿는 구체적인 사연이 된다. 배삼식 작가가 3년만에 쓴 연극 ‘1945’(국립극단)가 그렇다.

1945.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보는 순간 해방과 광복, 독립 따위의 단어를 떠올릴 법하지만 이야기를 채우는 것은 두 아이의 관점에서 바라본 만주라는 공간, 그 안에서 고향 땅을 밟는 것 외에 어떤 희망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다.

국립극단의 연극 ‘1945’에서 위안소 포주 역할을 했던 선녀(배우 김정은)와 만주 전제민 구제소에서 맞딱뜨리게 된 명숙(배우 김정민)이 선녀에게 칼을 휘두른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일본군 위안소에서 함께 지옥을 경험한 미즈코가 한 일본인 사병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곤 뿌리치지 못한 채 만주까지 함께 오게 된 명숙. 해방의 공간이 된 만주에서 일본인과 일제 부역자들은 보복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결국 명숙은 미즈코를 자신의 벙어리 동생이라고 속이고 전재민(戰災民) 구제소로 들어간다.

명숙과 미즈코는 아이들을 팔아 만주까지 갈 종잣돈을 마련했고 선녀는 이들을 일본군에 팔아 생명을 부지했다. 모두가 저마다의 지옥을 맛본 이들인데도 구제소에서 맞딱뜨리게 된 이들은 진창에서 허우적댔던 과거를 숨겨야만 한다. 이들이 등진 인간성은 함께 북엇국을 끓이고 떡을 만들어 파는 사이 회복될 듯 보인다. 그러나 새로운 시작점, 이른바 영점지대에 놓인 인간들에게 여전히 도리나 윤리, 고통의 연대는 사치스럽다.



해방공간에서 장수봉(배우 박윤희)을 남편으로 맞게 된 선녀(배우 김정은). 그러나 행복도 잠시. 장수봉은 돌림병에 걸려 죽어가고 선녀는 병을 옮을 위험에는 아랑곳 없이 그의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려 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배 작가는 아마도 반전을 노렸을 것이다. 역사의 쳇바퀴가 굴러가는 중에도 자기만의 이야기로 자전하고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1945’라는 차가운 제목 뒤에 감추면서 말이다. 희망을 보기 어려운 시공간을 그리면서도 극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유쾌했던 탓에 구제소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기 직전 신분이 탄로난 미즈코와 명숙을 버리는 장면, 아편쟁이 선녀와 돌림병에 걸려 죽을 위기에 처한 장수봉을 버리는 장면은 더욱 극적이다.

구제소 사람들이 기차에 오르기 직전 미즈코가 숨겨둔 기모노를 찾아내면서 미즈코와 명숙의 정체가 탄로난다. 사람들은 이들은 ‘더럽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명숙은 “그 어떤 지옥도 우리를 더럽히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아이러니한 것은 모두가 더럽다고 손가락질했던 위안소 출신 명숙과 일본인 미즈코, 아편쟁이 선녀가 모두가 버리고 떠나가는 장수봉을 거둔다는 사실이다. 이를 통해 시대의 특수성은 사라지고 고통을 나누어 짊어지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남는다. 결국 이 작품은 그 어떤 지옥에서도 더럽히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 이명숙과 미즈코, 박선녀와 장수봉 같은 이름으로 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이야기다.

3시간 가까운 상연시간은 결코 짧지 않으나 탄탄한 서사와 배우들의 연기력에 시간을 체감하기 쉽지 않다. 모든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있고 입체적이다.

지옥을 함께 벗어난 미즈코와 명숙. 조선과 일본을 벗어나 고통을 함께 한 두 사람으로서 미즈코와 명숙은 손을 맞잡는다. /사진제공=국립극단


여백의 미를 통해 메시지를 분명히 한 무대 역시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마치 비어 있는 공간처럼 언덕만 덩그러니 있던 무대에 사람이 채워지고 굴곡졌던 그들의 이야기가 채워졌다. 30일까지 명동예술극장

/서은영기자 supia927@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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