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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역사와 종교의 자취 깃든 익산]미륵사지·왕궁리...1,400년전 백제의 숨결을 느끼다

2기만 남은 미륵사지 당간지주

높이 9m 왕궁리 오층석탑 등

구석구석 찬란한 역사의 흔적이

김대건 순교여정 첫발 내디딘

나바위성당도 함께 둘러볼만

미륵사는 백제 무왕때인 7세기에 세워진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전기까지 보존됐지만 임진왜란때 소실돼, 지금은 국보 11호 미륵사지 석탑과 보물 236호 당간지주 2기만 남아있는데, 이들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 있다.




기자에게 익산은 두 가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첫 번째는 ‘이리(익산의 옛 이름)역 폭발사고’다. 지난 1977년 이리역에서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해서 역 일대가 폐허로 변하고 이곳 전체가 재난 지역으로 지정된 큰 사고였다. 두 번째는 교통의 요지이자 먹고사는 걱정이 없는 지방이라는 것. 1970년대만 해도 서울에 있는 학교에도 한 반에 몇 명씩은 도시락을 못 싸오는 학생들이 있었는데 익산에는 아무리 가난한 집 아이들도 도시락을 못 가져오는 아이들은 없었다고 들었다. 그것은 익산이 그만큼 곡창인 동시에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두 가지 기억이 뒤편에 자리 잡고 있는 익산의 진면모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숨겨진 속살을 보기 위해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익산의 구석구석을 누볐다.

사리를 담았던 그릇.


익산의 첫 번째 여정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미륵사지다. 미륵사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려서자 땅바닥을 달군 복사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인 7세기에 세워진 절로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 전기까지 보존됐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돼 지금은 국보 11호 미륵사지석탑과 보물 236호 당간지주 2기만 남아 있다. 그래도 두 유물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전시관 안에서 단체 관광객들에게 설명하던 해설사는 “무왕 때 건립된 미륵사지석탑은 민흘림기둥과 옥개석의 끝이 하늘을 향한 귀솟음 기법만으로도 이 탑이 목조건축 기법으로 축조됐음을 보여준다”며 “안타깝게도 절반 이상이 무너져 동북쪽 한 귀퉁이만 6층까지 남았다”고 말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제는 1915년 여기에 시멘트를 붓는 것으로 보수를 대신하고 말았다. 2001~2010년 문화재위원회는 더 이상의 붕괴를 막기 위한 전 단계로 해체를 시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금제사리호를 비롯해 국보급 유물들이 출토됐다. 한창 복원 중인 미륵사지석탑은 가건물로 뒤덮여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수리 중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 구경이 성에 차지 않았다면 왕궁리로 가서 오층석탑을 봐야 한다. 왕궁리 오층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본떠 만든 백제계 석탑이다. 높이는 9m에 달하며 1965~1966년 복원됐다. 복원 도중 1층 옥개석과 기단에서 금강경판 19장, 금동계사리함, 사리병이 발견됐다. 석탑 주변에서 통일신라 시대의 명문 기와가 출토돼 축조시기를 놓고 백제, 통일신라, 고려 초라는 다양한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있는 사적 제318호 나바위성당은 1906년에 건축됐다.


익산에는 불교 유적 외에 기억할 만한 천주교 유적도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있는 사적 제318호 나바위성당으로 1906년에 건축됐다.

호남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성당은 1845년(헌종 11)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강경포(江景浦) 부근에 상륙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초대주임이던 조제프 베르모렐 신부에 의해 1906년에 건축됐다.

그러니까 이곳 익산은 천주학을 배우기 위해 마카오로 떠났던 소년 김대건이 청년이 돼 돌아와 순교 여정의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대부분의 초기 성당이 그렇듯 크지 않은 규모의 고딕양식 건물이지만 단정한 내·외관에 보존이 잘돼 있고 풍광 또한 아름다워 들러볼 만하다.

한옥과 양식의 기법을 절충한 이 성당은 원래는 정면 5칸, 측면 13칸의 크기에 정면과 양 측면의 툇간이 마루로 조성된 목조건물이었다. 또 정면에는 목조종탑(木造鐘塔)과 십자가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16년에 증축하는 과정에서 목조종탑을 없애고 고딕식 벽돌조 종각(鐘閣)을 툇간에 붙여 증축했다. 이 과정에서 목조로 된 벽을 헐고 벽돌을 쌓았다. 또 양 측면 툇간의 마루를 없애고 회랑(回廊)으로 만들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됐다. 그 후로도 두 차례의 개수를 거쳐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글·사진(익산)=우현석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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