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4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집무실을 한남동 승지원에서 서초동 삼성전자 42층으로 옮겼다. 삼성 특검으로 진통 끝에 경영에 복귀한 지 1년 만의 결단이었다. 당시 삼성전자를 수식하는 사자성어는 ‘청출어람’이었다. 소니·샤프·엘피다 등 일본 업체가 죄다 흔들리면서 찬사가 쏟아진 것. 하지만 이 회장은 달랐다. 일본 기업이 삼성의 미래일 수 있다고 봤다. 그래서 원거리 경영을 버리고 직원 곁에 집무실을 두는 변화를 택했다.
그로부터 딱 7년이 흐른 올 3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유럽과 캐나다를 둘러봤다. 2월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첫 해외 일정이었다. 그리고 두 달 만인 지난 22일 삼성은 인공지능(AI) 해외네트워크 구축을 발표했다. 하드웨어 부문에서 플랫폼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삼성전자가 빅스비·삼성페이 등을 통해 새 비즈니스 모델을 내놓기 위한 행보라는 분석이 나왔다. 특히 오너 부재로 흔들렸던 ‘거함’ 삼성이 중심을 잡아가고 있음을 알리는 결정적인 증표로 받아들이는 기류도 있다. 재계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 부회장 복귀로 최고의사결정 라인을 막아왔던 혈전이 뚫리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전자업계 임원은 “과거 이 회장이 경영 복귀 후 조직의 메기를 자청한 것처럼 이 부회장도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복잡한 실타래를 하나둘 풀며 조직에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 같다”고 촌평했다.
◇사업 재편 위해 암중모색하는 JY=한 재계 관계자는 요즘 삼성을 두고 “가뒀던 수문이 열리는 느낌”이라고 표현했다. 지배구조·신성장동력 등 가장 난이도가 높은 분야에서 주요 의사 결정이 이뤄지고 있는 데 따른 평가다. JY 복귀가 결정적이었음은 불문가지다. 시장에서는 무엇보다 신수종 사업 발굴에서 성과가 임박했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기까지 한다. 근 2년 넘게 삼성에 눈에 띄는 인수합병(M&A)이 없기도 했고 오너가 진두지휘를 하지 않으면 대형 인수는 쉽지 않은 탓이다. 실제 2016년 80억달러를 들인 자동차 전장업체 하만 인수도 이 부회장이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리자마자 성사된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미국·영국·러시아·캐나다 등 다섯개 지역을 AI 연구 거점으로 삼고 오는 2020년까지 1,000명의 AI 인력 확보를 뼈대로 한 ‘AI 네트워크 구축’은 ‘대형 M&A’를 알리는 서막일 수 있다. JY 행보도 이런 기대감을 낳게 한다. JY는 이달 초 7일간 중국과 일본을 방문했다. 특히 광둥성 선전에서는 왕촨푸 BYD 회장,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 레이쥔 샤오미 회장 등 거물과 잇따라 회동했다. 재계의 한 임원은 “이 부회장이 무한한 가능성의 도시라는 중국판 실리콘밸리 선전에 갔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하다”며 “스타트업을 만나는 것은 물론 세트 업체와 칩 공급과 관련한 중장기 비즈니스 커넥션도 도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도 사업 재편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한 임원은 “(공백 기간이 있었던 만큼)M&A도 보류돼 있는 것이 있을 수 있다”며 “(이 부회장의 석방으로 M&A에 대한) 종합적 판단이 가능해진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삼성이 직접 AI 기업의 M&A가 무산된 적이 있다고 밝히지 않았느냐”며 “이 부회장의 경영 스타일이 M&A를 통한 기술 수혈에 거부감이 없고 삼성의 소프트웨어화도 가속화되고 있어 조만간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지배구조 개편, 노조 허용 등 전향적 조치도=JY의 석방 이후 새 리더십 구축을 위한 결단도 구체화되고 있다.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서는 삼성SDI의 삼성물산 주식 처분으로 순환출자 고리를 네개로 줄였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처분’을 골자로 한 공정위의 압박이 계속되면서 JY가 묘수를 찾을 수 있을지도 관심이다. 삼성의 경쟁력 훼손이 없어야 된다는 점에서 쉽지 않은 과제다. 이와 관련해 JY의 재판 일정은 변수가 될 수 있다. JY의 최종심은 국정농단과 관련한 최순실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2심이 마무리되는 9월은 지나야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에서는 내년 초를 유력한 시기로 본다.
선대부터 이어졌던 삼성의 무노조 경영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서비스가 8,000여명의 협력업체 직원을 정규직으로 받아들이며 노조를 허용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는 JY의 결단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자동차 노조 등 일부 귀족 노조와 견줘 삼성의 무노조 경영을 선견지명과 혜안으로 보는 시각도 엄연히 존재하지만 시대적 요구에 삼성이 화답한 측면이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 내부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중동 행보…확대해석 경계하는 삼성=정작 삼성 내부는 “정중동일 뿐”이라며 JY가 경영 전면에서 의욕적인 행보에 나서고 있다는 시각에 손사래를 치고 있다. 여기에는 삼성증권 배당 사고, 바이로직스 회계 논란,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한 정부 압박 등 외부 여건이 여전히 우호적이지 않다는 판단이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한 임원은 “(JY가) 중요 업무를 챙기겠지만 대외 이슈가 계속 진행 중이지 않느냐”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임원도 “계열사별로 신수종 사업 발굴을 위한 ‘지원 태스크포스(TF)가 생기면서 이런 것들이 맞물려 JY의 행보에 의미를 더 부여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전과는 다른 리더십에 주목해달라는 당부도 있다. 한 고위 관계자는 “지금 시점에 JY의 영향력에 대해 해석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면서도 “(JY가)실무자의 목소리에 더 경청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상훈기자 shlee@sedaily.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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