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수가 먹고 싶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14 17:11:38사는 일은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 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 -
바닥을 모시는 자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8.01 17:06:02머리에 밥 쟁반을 이고 가는 여자 손으로 잡지도 않았는데 삼층으로 쌓은 쟁반이 머리에 붙은 것 같다 목은 떨어져도 쟁반은 떨어질 것 같지 않은 균형이 아닌 결합이 되어 버린 여자 하늘 아래 머리 조아릴 바닥이 있다면 바로 저 여자의 머리 머리를 바닥으로 만든 머리 바닥에 내려놓고 파는 물건이 대부분인 시장통을 그녀가 간다 채소 가게 앞에 다다르자 주인 내외가 다가와 쟁반 하나를 내려 놓는다 바닥을 모시는 자들의 -
스무 번째의 별 이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25 11:38:04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온 날은 내 입던 옷이 깨끗해진다 멀리서 부쳐 온 봉투 안의 소식이 나팔꽃 꽃씨처럼 우편함에 떨어진다 그 소리에 계절이 활짝 넓어진다 인간이 아닌 곳에도 위대한 것이 많이 있다 사소한 삶들이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권리가 나에겐 없다 누구나 제 삶을 묶으면 몇 다발 채소로 요약된다 초록 아니면 보라로 색칠되는 생이 거기 있다 풀꽃의 한 벌 옷에 비기면 내 다섯 벌의 옷은 너무 많다 한 광주리 -
접시가 깨진 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18 11:34:22외출하고 돌아온 저녁 접시가 깨져 있었네목련나무가 마침내 몸을 열던 날이었지매끄럽고 아름다워서 바라보기만 했던 접시여 그럼 안녕나와 고양이의 부주의로 접시가 깨질까 봐 전전긍긍했던 나날이여 이젠 안녕두 동강 난 접시를 버리러 가는 밤 비로소 나는 기뻐 날뛰네 고양이도 덩달아 벚꽃들처럼 설쳐대는 밤이네 접시는 본래 바닥이거늘 천장 가까운 찬장에서 섬김을 받고 있었네. 짜디짠 반찬국물에 몸서리치다가 더러 과 -
비의 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11 11:21:38아마, 거기가 눈잣나무 숲이었지 비가, 연한 녹색의 비가 눈잣나무에 내렸어 아니, 눈잣나무가 비에게 내려도 좋다는 것 같았어 그래, 눈잣나무 몸피를 부드럽게 부드럽게 씻겨주는 것 같았어 아마, 병든 아내의 등을 밀던 내 손길도 그랬었지 힘을, 주어서도 안 되고… 그저, 가벼이 껴안는 것처럼 눈잣나무에 내리는 비 그리, 자늑자늑 젖어드는 평화 아마, 눈잣나무도 어디 아픈 거야 문득, 지금은 곁에 없는 병든 아내가 혼자, -
어느 늦은 저녁 나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7.04 11:29:54어느 늦은 저녁 나는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밥을 먹어야지나는 밥을 먹었다어느 이른 아침 당신은 흰 공기에 담긴 밥에서 김이 피어 올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죠. 그때 당신은 고개를 끄떡였죠. 무엇인가 영원히 다가오고 있다고, 지금도 영원히 새롭게 다가오고 있다고. 밥을 먹어야지. 당신은 밥을 먹었죠. -
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27 13:59:57왕의 역할을 잘하는 배우가 부도내고 노숙자로 떠돌 때 헌 신문지 한 장 가진 사람도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는 얘기는 그의 연기보다 더 시큰하다채권자에게 쫓기며 빌딩숲 사이 맨 바닥에 누워 잘 때 곁에서 자던 노숙자가 덮고 있던 신문지를 반으로 찢어 주어 그것으로 밤새 추위를 덮고 절망을 덮고 아침에 온기로 눈을 뜨자 그대로 일어서서 무대로 돌아갔다는 얘기는 기교 넘친 드라마보다 더 시큰하다헌 신문지 -
재춘이 엄마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20 11:19:57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 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
언덕길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13 13:51:37쇠똥구리가 소똥을 굴린다. 온 힘을 다하여 소똥을 뭉쳐 안간힘을 쓰다가언덕 아래로 놓쳐버린다. 쇠똥구리는 희망처럼 아득한 길을 우두커니 바라본다.반겨주고 기다리는 식구들이 살아갈 집 한 채 짓기가 이렇게 힘들다니,식식대는 황소가 거품을 물고 싸놓고 지나간 똥이 징검다리에 놓인 까만 돌처럼 드문드문한 망초꽃 하얗게 핀 시오리길,밥이 똥이고, 똥이 밥이라는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오래된 셰프죠. 똥내 배지 않 -
저 할머니의 슬하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6.06 18:32:18할머니 한 분이 초록 애호박 대여섯 개를 모아놓고 앉아 있다. 삶이 이제 겨우 요것밖에 남지 않았다는 듯 최소한 작게, 꼬깃꼬깃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귀를 훨씬 지나 삐죽 올라온 지게 같은 두 무릎, 그 슬하에 동글동글 이쁜 것들, 이쁜 것들, 그렇게 쓰다듬어보는 일 말고는 숨쉬는 것조차 짐 아닐까 싶은데 노구를 떠난 거동일랑 전부 잇몸으로 우물거려 대강 삼키는 것 같다. 지나가는 아낙들을 부르는 손짓, 저 허공의 반경 -
마리아나 해구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5.30 17:53:47해적의 노래를 부르며 간다 그 동안 얼마를 모았건 얼마를 잃었건 아이야 아오아 양팔에 힘을 주고 타륜을 돌리자돛이 그리는 구름이 물살을 따라 뒤노는 물고기가 모두 내것이라 해도 그저 아오아 아이야 속도를 높일 뿐맥주를 부어라 넌 어디서 왔다고 했지? 네가 저지른 바보 같은 짓이 뭐라고? 아이야 아오야 아오아 아이야어서 부어라 네가 못 이룬 꿈이 너를 찼다는 그이가 맥주의 맛을 좋게 하는구나달을 던지면서 별을 박 -
어머니가 사는 곳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5.23 18:27:11옷이 엄니 손같이 느껴지는 날 나는 아이처럼 엄니가 벗겨주던 대로 옷을 벗는다 물끄러미 앞섶 바라보던 콧날 참 따뜻하다 내 안의 것을 보는 듯한 눈빛 한 종지 미소 같은 단추를 끄른다 눈물 가득 고인 조그만 호수 주름진 엄니 손마디 물결처럼 일렁인다 얼룩진 윗도리 벗어 빨래통에 던진다 던지면서 돌아앉는 뒷모습에 얼른 다시 줍는다 엉거주춤 벌린 두 팔 엄니가 안아 달랬을 세월 안겨 있다 단단히 여며주지 못해 힘들어 -
꽃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5.16 17:43:02꽃을 피워 밥을 합니다 아궁이에 불 지피는 할머니 마른 나무에 목단, 작약이 핍니다 부지깽이에 할머니 눈 속에 홍매화 복사꽃 피었다 집니다 어느 마른 몸들이 밀어내는 힘이 저리도 뜨거울까요 만개한 꽃잎에 밥이 끓습니다 밥물이 넘쳐 또 이팝꽃 핍니다 안개꽃 자욱한 세상, 밥이 꽃을 피웁니다 ‘꽃’, 외자로 된 네 이름을 부르면 캄캄한 세상이 환해진다. ‘밥’, 외자로 된 네 이름을 부르면 차가운 세상이 따뜻해진다. -
아기 한 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5.09 14:08:24붐비는 시장 좁다란 골목, 어쩌다 홀로 나왔는지 아장아장 아기가 걸어갑니다 찬거리 담긴 봉지들이 묵직한 시장바구니들이 아기 곁을 조심조심 지나갑니다 아기를 에워싸는 저 훈훈한 공기막, 비린 잇속에 발 빠른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오늘, 재래시장 좁다란 골목 안에 아기 연꽃 한 송이 피워냅니다봄은 여린 것들 천지다. 새싹, 꽃잎, 병아리, 어린이.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가냘프고 약해서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 -
봄날은 간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4.25 11:11:18월출산 그늘을 지날 즈음 은밀한 달이 발목을 잡아 지친 몸 뉘러 들어간 여각 베니어합판 꽃무늬 너머 수줍은 소리 들리네사부작사부작 벚꽃이 피네몸이 연주하는 화음에 취한 부끄러운 새벽이 실눈 뜰 무렵 짐 챙겨 여각 앞을 나서려 보니 세상을 다 얻은 청춘이 연분홍 치마를 흥얼거리네우르르우, 르, 르……… 벚꽃이 지네.바위도 꿈틀 엉덩이 고쳐 앉는 봄 아니던가요? 삭정이도 울끈 힘쓰고 보는 봄 아닌가요? 아흔 고개 넘
오늘의 핫토픽
이시간 주요 뉴스
영상 뉴스
서경스페셜

주소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6 트윈트리타워 B동 14~16층 대표전화 : 02) 724-8600
상호 : 서울경제신문사업자번호 : 208-81-10310대표자 : 손동영등록번호 : 서울 가 00224등록일자 : 1988.05.13
인터넷신문 등록번호 : 서울 아04065 등록일자 : 2016.04.26발행일자 : 2016.04.01발행 ·편집인 : 손동영청소년보호책임자 : 신한수
서울경제의 모든 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복사·배포 등은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Copyright ⓒ Sedaily,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