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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7.17 17:25:13- 문정희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식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둥치 검은 백년 복사나무라도 지금 핀 꽃은 젊다. 구순 노인의 가슴에도 세 살 동심 한 송이쯤 남아 있다. 살아 있는 동 -
불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2.20 17:14:22낯선 이가 불쑥 내미는 손 잡아본 적 있다불쑥,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 있듯 살다 보면 불쑥 마음 문 미는 사람 있다준비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자 기다리라고 말하지 말자 아직 때가 아니라는 핑계로 그 손 부끄럽게 하지 말자목말라 본 사람은 안다 불쑥 손 내밀 수밖에 없는 이유를불쑥, 내미는 손 무례한 줄 알았더니 다급한 것이었군요. 목이 마르거나, 물에 빠졌을 때 염치 불구하고 손 내밀 수밖에요. 뉘라서 그 손 뿌리치 -
학생부군과의 밥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2.13 17:33:15녹두빈대떡 참 좋아하셨지 메밀묵도 만둣국도 일 년에 한 두어 번 명절상에 오르면 손길 잦았던 어느 것 하나 차리지 못 했네 배추된장국과 김치와 동치미 흰 쌀밥에 녹차 한 잔 내 올해는 무슨 생각이 들어 당신 돌아가신 정월 초사흘 아침밥상 겸상을 보는가 아들의 밥그릇이 다 비워지도록 아버지의 밥그릇 그대로 남네 제가 좀 덜어 먹을게요 얘야 한 번은 정이 없단다 한 술 두 술 세 숟갈 학생부군 아버지의 밥그릇 아들의 -
시린 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2.06 17:35:20살얼음 친 고래실 미나리꽝에 청둥오리 떼의 붉은 발들이 내린다그 발자국마다 살얼음 헤치는 새파란 미나리 줄기를 본다가슴까지 올라온 장화를 신고 그 미나리를 건지는 여인이 있다난 그녀에게서 건진 생의 무게가 청둥오리의 발인 양 뜨거운 것이다꽝꽝 언 겨울 대지에도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서 눈뜨고 있다. 땅속의 알뿌리들과 나뭇가지의 겨울눈들은 종교처럼 봄을 믿고 있다. 얼음천장에 갇힌 물고기들은 아지랑이 사면을 -
비무장지대에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1.30 17:08:50여기서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육십 년 전에 떠나온 고향 마을이 보인다.불에 타 허물어진 돌담 곁에 접시꽃 한 송이가 빨갛게 피어 있다.얘들아, 다 어디 있니, 밥은 먹었니, 아프지는 않니?보고 싶구나!육십 년 바라보아도 접시꽃은 피어 있군요. 육십 년 지났어도 접시꽃만 피어 있군요. 허물어진 돌담은 여전히 허물어진 채로 배경이 되고 있군요. 고장 난 시계처럼 그 때만, 낡은 사진처럼 그 장면만 기억의 한 켠에 박혀 있군 -
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1.23 17:29:12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별들이 보이지 않는다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별들이 보인다지금 어둠인 사람들만별들을 낳을 수 있다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세상이 어두우면 별이 빛날 차례로군요. 지금 어둠인 사람은 빛이 될 차례로군요. 모든 새싹이 땅의 어둠에서, 모든 꽃이 가지의 어둠에서, 모든 새들이 알의 어둠에서 깨어난 것처럼. 세상이 환하면 별이 사라질 차례 -
수달의 고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1.16 18:07:56매립지 공사가 한창인 낙동강 하류, 미꾸라지 등 민물 먹잇감이 바닥난 자그마한 수달이 횟집 창을 넘어와 처음에는 바닷장어 같은 것을 물고 가기에 애교로 봐주었더니 조금씩 대담해져 이제는 네 다리로 수조 안을 첨벙대며 보리새우, 우럭에다 값비싼 감성돔까지 물고 가니 덫을 놓을 수도 없고 아무리 천연기념물 330호에 멸종위기 1호라지만 이래도 되는 거냐며 손해배상 청구할 데라도 있으면 가르쳐달라고 횟집 주인은 TV -
빨래집게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1.09 16:58:36빨랫줄의 빨래를 빨래집게가 물고 있다 무슨 간절한 운명처럼 물고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어느 더러운 바닥에 다시 떨어져 나뒹굴지도 모를 지상의 젖은 몸뚱어리를 잡아 말리고 있다 차라리 이빨이 부러질지언정 놓지 않는 그 독한 마음 없었다면 얼마나 두려우랴 위태로우랴 디딜 곳 없는 허공 흔들리는 외줄에 빨래 홀로 매달려 꾸득꾸득 마르기까지 빨래집게가 빨래를 물고 있는 동안, 빨랫줄은 처마 밑의 기둥과 마당귀의 -
극명克明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8.01.02 17:32:31이른 아침 한 떼의 참새들이 날아와서는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날고 마당을 종종걸음치기도 하고 재잘재잘 하고 한 것이 방금 전이다 아 언제 날아들 갔나 눈 씻고 봐도 한 마리 없다 그저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이 가지 저 가지가 반짝이고 울타리가 반짝이고 쥐똥나무가 반짝이고 마당이 반짝이고 아 내가 언제부터 이런 극명克明을 즐기고 있었나. 어둠이 물러가고 먼동이 트면 가장 먼저 새들이 아침을 물고 창가로 온 -
기러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26 17:30:56저 새들은 어디서 오느냐고 아이가 물었다 세상 저 끝에서 온다고 말해주었다.저렇게 떼 지어 어디 가는 거냐고 또 물었다 세상 저 끝으로 간다고 말해주었다.그럼 어디가 세상 끝이냐고, 이번엔 정색하고 올려다본다 잠깐 궁리 끝, 기러기 내려앉는 곳이겠지, 하고 둘러댔다.호숫가 외딴 오두막 가까이 키보다 높은 갈대들 손 저어 쉬어 가라고 기러기 부르는 곳 저녁 막 먹고 나란히 서서 고개 젖혀 하늘 보며 밭고랑에 오줌발 -
애인 있어요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19 17:43:19여든세 살 그 여자 노래 부르네 애인 있어요 전국노래자랑에서 부르네 다리가 후들거리고 목소리가 떨리네 기울어진 백발로 뿌리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숨 윗줄기 잡기 전 마지막 안간힘으로 내민 뼈마디 허공으로 벋는 나팔꽃 덩굴손 흔들리지 않고는 그대에게 닿을 수 없네 며늘아, 남우세스럽다 채널 돌리지 마라. 여든세 살에 노래도 못 부르고, 애인도 없고, 전국노래자랑도 못 나가고, 후들거리며 세울 다리도 없고, 떨리는 -
웃어야 사는 여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12 17:21:21달리는 버스 옆구리 살에 찰싹 달라붙어 환하게 웃는다, 여자 얼굴 가득 새카만 먼지 뒤집어쓰고 비라도 오는 날엔 땟물이 주르륵 흘러내리는데 빗물이 눈에 들어가도 깜박일 새 없이 그저 웃으며 달리는 맵찬 겨울바람 여름 땡볕 아랑곳하지 않고 날마다 하얀 잇속 드러내고 달려야 사는 여자 산다는 건 어쩌면 종일 아슬아슬한 차창에 고단하게 매달려 웃으며 달려가는 것 노란 신호 윙크에 가다 서다, 호흡 잠시 다듬으며 누가 -
나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2.05 17:18:09짐짝을 등에 지고 날거나, 헬리콥터처럼 짐짝을 매달고 날아가는 나비를, 나는 본 적이 없다. 나비는 바늘처럼 가벼운 몸 하나가 있을 뿐이다. 몸 하나가 전 재산이다. 그리고 무소속이다. 그래서 나비는 자유로운 영혼과 같다. 무소유(無所有)의 가벼움으로 그는 날아다닌다. 꽃들은 그의 주막이요, 나뭇잎은 비를 피할 그의 잠자리다. 그의 생은 훨훨 나는 춤이요, 춤이 끝남은 그의 죽음이다. 그는 늙어 죽으면서 바라는 것이 -
지금 여기가 맨 앞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28 17:26:44나무는 끝이 시작이다.언제나 끝에서 시작한다.실뿌리에서 잔가지 우듬지새순에서 꽃 열매에 이르기까지나무는 전부 끝이 시작이다. 지금 여기가 맨 끝이다.나무 땅 물 바람 햇빛도저마다 모두 맨 끝이어서 맨 앞이다.기억 그리움 고독 절망 눈물 분노도꿈 희망 공감 연민 연대도 사랑도역사 시대 문명 진화 지구 우주도지금 여기가 맨 앞이다. 지금 여기 내가 정면이다. 나무는 온몸으로 맨 앞에 서는군요. 수없이 갈라진 저 가지 -
누가 더 깝깝허까이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11.21 17:23:14강원도 산골 어디서 어지간히 부렸다던 암소를 철산양반이 단단히 값을 쳐주고 사왔다 한데 사달이 났다 워워 핫따매 워워랑께, 내나 같은 말일 것 같은데 일소가 아랫녘 말을 통 알아듣지 못한다 흐미 어찌야 쓰까이, 일소는 일소대로 갑갑하고 철산양반은 철산양반대로 속이 터진다 일소를 판 원주인에게 전화를 넣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저번참과 똑같단다 그 소, 날래 일 잘했드래요 척 보니, 못 알아듣는 게 아니구 못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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