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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에 대한 경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31 11:20:20늙은 신발들이 누워 있는 신발장이 나의 제단이다. 탁발승처럼 세상의 곳곳으로 길을 찾아다니느라창이 닳고 코가 터진 신발이 나의 부처다. 세상의 낮고 누추한 바닥을 오체투지로 걸어온저 신발들의 행적을 생각하며 나는 촛불도 향도 없는 신발의 제단 앞에서아침저녁으로 신발에게 경배한다.그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합장하는나는 신발의 行者,신발이 끌고 다닌 그 수많은 길과 그 길 위에 새겼을 신발의 자취들은내가 평 -
이것도 없으면 너무 가난하다는 말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24 10:32:32가족이라는 게 뭔가. 젊은 시절 남편을 떠나보내고 하나 있는 아들은 감옥으로 보내고 할머니는 독방을 차고앉아서 한글 공부를 시작했다. 삼인 가족인 할머니네는 인생의 대부분을 따로 있고 게다가 모두 만학도에 독방 차지다. 하지만 깨칠 때까지 배우는 것이 삶이다. 아들과 남편에게 편지를 쓸 계획이다.나이 육십에 그런 건 배워 뭐에 쓰려고 그러느냐고 묻자 꿈조차 없다면 너무 가난한 것 같다고 지그시 웃는다. 할머니의 -
꽃을 먹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17 10:45:45동부시장 시계탑이 내려다보고 있는 사거리, 정오, 튀김 천막 내외가 점심상을 받는데 다붓하게 마주 앉아서 <시골밥집> 된장찌개를 놓고 흰밥을 먹는데 된장 한 그릇에 들어가는 두 개의 숟가락이 서로의 입속에 깊숙이 혀를 밀어넣듯 서로를 먹이는데 길 위에서 먹는 밥이 달고도 달아 서로를 먹어주는 것이 달고도 달아 아, 먹는 일 장엄하다 펑펑 지구 어딘가에서는 산수유 피고 노란 꽃가루가 토핑처럼 뿌려지는 시장(市場)을 -
운주사 돌부처님께 말 걸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10 11:13:08어느 별에서 망명 온 난민인지요 온몸 가득 마마 자국 더께 진 몰골에 집도 절도 없이 노숙자로 사시는 영구산 운주사 돌부처님들왜 하필이면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이 막돼먹은 세상에 오셨는지요 아낙네가 코 떼어 속곳 속에 감춰도 없어도 없지 않고 있어도 있지 않으니 숨 쉬지 않고도 영겁으로 가시며아등바등 사는 이들 깨진 꿈 주워 개떡탑 거지탑 요강탑 쌓아 놓고 어느 새 내 맘속에 기척 없이 들어와 탐욕 덩어리 모아 -
책 읽는 소녀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5.03 11:24:15아빠가 다닌 문 닫은 초등학교개망초 꽃밭에 책 읽는 소녀상혼자 남아 나머지 공부하죠.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밤낮 똑같은 책이십 년 넘도록 한 쪽도 못 넘기죠. 나도 처음 몇 년은 엉덩이가 들썩거렸죠. 한 장도 넘기기 어려운 시멘트 동화책을 집어던지고, 의자에서 일어나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들’ 따라 교문 밖으로 걸어나가고 싶었죠. 단발머리 나풀대는 여중생, 팔짱 낀 여고 동창생이 부러웠죠. 청운의 캠퍼스를 나 -
복사꽃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26 11:26:14갓난애에게 젖을 물리다 말고 사립문을 뛰쳐나온 갓 스물 새댁, 아직도 뚝뚝 젖이 돋는 젖무덤을 말기에 넣을 새도 없이 뒤란 복사꽃 그늘로 스며드네. 차마 첫정을 못 잊어 시집까지 찾아온 떠꺼머리 휘파람이 이제야 그치네. 복사나무는 가지마다 복사꽃이라도 벌 나비가 다 찾은 것은 아니었으리. 벌 나비가 첫정을 주었어도 꽃마다 결실은 어려웠으리. 가녀린 꽃잎에도 빗방울과 바람의 드잡이가 빗겨가진 않았으리. 아낙들은 -
분홍 나막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19 11:16:53님께서 새 나막신을 사 오셨다 나는 아이 좋아라 발톱을 깎고 발뒤꿈치와 복숭아뼈를 깎고 새 신에 발을 꼬옥 맞추었다그리고 나는 짓찧어진 맨드라미 즙을 나막신 코에 문질렀다 발이 부르트고 피가 배어 나와도 이 춤을 멈출 수 없음을 예감하면서 님께서는 오직 사랑만을 발명하셨으니분홍 나막신 신고 가는 널 보았다. 큰소리로 이름을 부르려다 입술이 굳었다. 너는 춤추는 듯 했으나 절름거렸다. 딛는 곳마다 꽃물인 줄 알았 -
소풍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12 14:07:44여기서 저만치가 인생이다 저만치,비탈 아래 가는 버스 멀리 환한 복사꽃꽃 두고 아무렇지 않게 곁에 자는 봉분 하나 여기서 저만치 사이 우리가 간다. 여기서 저만치 사이 꿈을 꾼다. 여기서 저만치 사이 일대사를 건다. 여기서 사랑을 하고, 저기서 전쟁을 한다. 사이사이 웃다가 운다. 피안행 버스인 줄 알지만 모두 차안에서 내린다. 비탈길 돌아가는 여기는 어디쯤일까? 우리가 살아 무겁게 여겼던 일은 정말로 무겁고, 가벼 -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4.05 11:06:21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
낮잠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29 15:08:47여덟 살 때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 집 닭장이 엎어졌기 때문이다 하느님보다 더 무서운 우리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회초리가 무섭고 사사건건 고자질하는 누나도 무섭다 맷돌 뒤로 들어간 공을 꺼내다가 맷돌이 떨어지고 맷돌 위에 얹힌 닭장이 엎어졌다 닭장 속에는 알을 품고 있던 암탉이 소리 질렀고 달걀은 깨어져 물이 되었다 따뜻한 달걀 속엔 병아리의 심장과 핏줄이 떠 있다 부러진 암탉의 다리에 붕대를 감 -
버려진 전화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22 11:47:04버려진 전화기-권예자 作 그녀가 하는 일은 남의 말 들어 주는 일 남의 말 전해 주는 일 듣고 본 것 많아도 입 다물고 시앗 여럿 보아도 시샘하지 않았지 사람들은 슬프거나 기쁘거나 들뜨고 화가 나도 그녀를 찾았지 들어 주는 일로 평생을 소일하다 청력을 잃은 어느 날 그렇게 들고나던 사람들이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지 주인은 죄 없는 그녀를 패대기치더니 쓰레기통에 던져버렸지 하지만 그녀는 버림받고 나서야 난생 처음 -
둥실둥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15 11:28:25둥실둥실- 신현정 作봄에 들판에 나와 풀을 뜯고 있는 염소의 뿔에 풍선이라도 달아 염소를 하늘에 둥실둥실 뜨게 하자 하늘에 염소들이 둥실둥실 염소들이 흰구름도 올라타고 흰구름에 누우며 흰구름에 걸터앉아 담배도 태우며 음메에 음메에 그래 하늘 위에서 쩌렁쩌렁 호령하는 하나님의 음성도 깜쪽같이 음메에로 변조시키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란 오직 음메에 음메에 뿐으로 하자 한나절만이라도 염소들이 하나님하게 하 -
말뚝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08 11:46:10作말뚝-심우기 어린 흑염소에겐 힘은 말뚝이다 뿔이 나고 털이 억세져도 말뚝의 끈을 넘지 못한다 강한 뒷다리와 넓은 어깨로도 뽑지 못하는 말뚝은 신 늘 지는 싸움인 줄 알지만 고집은 염소 고집 돌아와 빙글빙글 돌다 제 목을 감아 옴짝달싹 못하게 될지라도 갈 데까지 가고 본다 밧줄의 길이만큼이 세상인 염소에게 말뚝은 세상의 중심이다 권력이다 그래도 염소는 뱅글뱅글 돈다 천만에! 저 풀밭은 본래 임자가 없었으나 말뚝 -
하루의 사용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3.01 20:44:35하루의 사용법-조재형 作 슬픔은 수령하되 눈물은 남용 말 것 주머니가 가벼우면 미소를 얹어 줄 것 지갑을 쫓지도 쫓기지도 말고 안전거리를 확보할 것 침묵의 틈에 매운 대화를 첨가할 것 어제와 비교되며 부서진 나 이웃 동료와 더 견주는 건 금물 인맥은 사람에 국한시키지 말 것 숲 속의 풀꽃 전깃줄의 날개들 지구 밖 유성까지 인연을 넓혀갈 것 해찰을 하는데 1할은 할애할 것 고난은 추억의 사원 시간을 가공 중이라고 자 -
한솥밥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2.23 11:05:37한솥밥-문성해 作기껏 싸준 도시락을 남편은 가끔씩 산에다 놓아준다 산새들이 와서 먹고 너구리가 와서 먹는다는 도시락애써 싸준 것을 아깝게 왜 버리냐 핀잔을 주다가 내가 차려준 밥상을 손톱만한 위장 속에 그득 담고 하늘을 나는 새들을 생각한다내가 몇 시간이고 불리고 익혀서 해준 밥이 날개 죽지 근육이 되고 새끼들 적실 너구리 젖이 된다는 생각이 밥물처럼 번지는 이 밤은하수 물결이 잔잔히 고이는 어둠 아래 둥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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