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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이 울어 해는 뜬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7.01.03 14:23:15당신의 어깨 너머 해가 뜬다우리 맨 처음 입 맞출 때의그 가슴 두근거림으로, 그 떨림으로당신의 어깨 너머첫닭이 운다해가 떠서 닭이 우는 것이 아니다닭이 울어서 해는 뜨는 것이다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처음 눈 뜬 두려움 때문에우리가 울었던 것은 아니다우리가 울었기 때문에세계가 눈을 뜬 것이다사랑하는 이여,당신하고 나하고는이 아침에 맨 먼저 일어나 더도 덜도 말고 냉수 한 사발 마시자저 먼 동해 수평선이 아 -
소주 한 병이 공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2.27 17:59:20막 금주를 결심하고 나섰는데 눈앞에 보이는 것이 감자탕 드시면 소주 한 병 공짜란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삶이 이렇게 난감해도 되는 것인가 날은 또 왜 이리 꾸물거리는가 막 피어나려는 싹수를 이렇게 싹둑 베어내도 되는 것인가 짧은 순간 만상이 교차한다 술을 끊으면 술과 함께 덩달아 끊어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 한둘이 어디 그냥 한둘인가 세상에 술을 공짜로 준다는데 모질게 끊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있는가 불 -
별을 향한 변명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2.20 11:11:17별들이 우리를 보며 눈빛을 반짝이는 거라고 믿었다 밤마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사람들은 모두 선한 씨앗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사랑이 손짓해 부르면 그를 따라야 한다고 말했고 물불 안 가리고 사랑의 강물에 뛰어들었다 이길 수 없는 것들에게 싸움을 걸었다 판판이 깨지고 나서도 지지 않았다고 우겼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희망을 이야기했다 시인이 아름다 -
우물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2.13 10:39:05찰랑찰랑 넘칠 때는 깊이를 몰라낮밤 없이 은빛 수면 다녀가는 것들짚새기로 닦아낸 노줏발처럼은밀한 추억 되어 반짝, 반짝이더니오랜 가뭄 끝의 바닥사소한 부주의가 하나 둘 시나브로 빠트린온갖 잡동사니 그득하구나가지 떠난 꽃으로 냄새 피우는 사랑꼬리에 꼬리를 물고 번지는 추문, 추문들 온 마을 사람들 밥 짓고, 목 축이고, 빨래하던 우물 하나의 비밀도 저러하다. 바닥이 드러나자 온갖 잡동사니와 냄새와 추문들 그득 -
밥그릇을 씻으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2.06 17:26:13한 끼 분인 밥그릇 속이 깊다밥 한 그릇이면 슬픔을 면하고 죄 짓는 일을 피할 수도 있겠지 요만한 깊이라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만한 함정이 될 수도 있겠다나는 힘들게 살아가는 자라 밥그릇 속에 주먹을 넣어 본다 아니다 손을 펴 밥그릇을 씻어준다톡, 두드려 주기도 한다 밥 한 그릇 버느라 애써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밥이 하늘인 것을. 슬픔을 겪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결국 울면서 떠 넣은 밥심으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을 -
어떤 경우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1.29 17:20:14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 세상 앞에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위태롭게 일렁거린다.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사람을 세상 전부로 아는 사람들이 숨죽여 바라본다.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한 사람이 잘못되면 그를 세상 -
경계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1.22 18:00:07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조선시대 궁궐의 화기를 막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시하라는 뜻으로 사헌부 앞에 세웠다는 해태야. 오늘도 광화문 앞에서 두 눈 부릅뜨고 갈기 휘날리고 있구나. 아직도 시비선악을 가릴 줄 아는 영험한 능력 -
눌려진 깡통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1.15 10:32:58참 요란하게도 돌아다녔다 내 몸은 통울대로 만들어진 모양 살짝만 건드려도 도시 구석구석 감춰진 소리들이 다 도망친다누가 나를 이 차도 한복판에 차버렸을까 두개골을 우그러뜨리며 바퀴들이 지나간다이제 바람의 희롱에 요란하게 구르지 않아도 된다내장이 터진 생쥐와 함께 점점 납작하게 길이 되어가는 동안,그간 내 목청에 가려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새소리, 바람 소리 같은 은밀한 소리들이 들려온다더 많은 소리들을 듣 -
지붕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1.08 11:21:29산은 지붕을 해마다 인다 묵은 기와를 걷어내고 추녀 끝에서 용마루 쪽으로 인다 기와 사이가 너무 넓으면 꽃으로 덮는다 무료한 지붕은 어디에도 없도록 바위가 있으면 푸른 이끼를 바르고 돌무지가 있으면 산새 소리로 촘촘히 엮는다 그 아래 사는 한지붕 식구들 기근에 비 맞지 않게 뿌리에 찬바람 들지 않게 해마다 청기와로 인다 청와대보다 높은 집 얼마나 노련한 기술자인지 기와 한 장 깨뜨리지 않는다 낯짝, 파렴치한 기 -
첫사랑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1.01 18:26:31가난뱅이 딸집 순금이 있었다 가난뱅이 말집 춘봉이 있었다 순금이 이빨로 깨뜨려 준 눈깔사탕 춘봉이 받아먹고 자지러지게 좋았다여기, 간신히 늙어버린 춘봉이 입안에 순금이 이름 아직 고여 있다 가난해서 순금이, 추워서 춘봉이. 이름만이라도 금빛이요, 봄빛으로 지은 건 아니었을까. 오죽한 살림, 여북한 이름들에도 첫사랑은 깃드는구나. 가난해서 찬란한 건가, 가난해도 찬란한 건가. 말똥 내음 진동해도 향기롭더니, 칠십 -
점등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25 18:01:20호박꽃 활짝 열린 콘센트에벌이 플러그를 꽂는 순간온 세상 환합니다넝쿨넝쿨 잎사귀푸르게 푸르게 밝습니다겨울, 봄, 여름…… 점멸하는 거리울타리 세워 담장 세워저 멀리 가을까지 닿은 전선에늙은 호박 골골이 환합니다호박인 줄 알았는데 등이었구나. 울타리에, 전선에 연등처럼 주렁주렁 달렸구나. 여름내 뜨거운 햇살 푸른 잎 깔때기로 모아 살뜰히도 충전하였구나. 물과 이산화탄소면 족한 줄 알았는데 플러그가 필요했구 -
자식의 은혜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18 11:11:10너, 몇 살이지? 15살요 엄마께서는요? 저도 15살이에요 농담도 잘 하시네요아뇨, 저는 얘를 낳고 엄마로 태어났거든요 얘 아빠도 그렇대요그렇지, 부모는 자식이 낳아 키워주지 평생이 걸리지만 부모로 키워주지 서로를 낳아 키우지 닭과 달걀처럼 말과 침묵처럼 밤과 낮처럼 손자 덕에 할머니로 태어나 자라는 나도.저런, 엄마와 자식이 동갑이구나! 닭이 달걀을 낳고, 달걀이 닭을 낳는 것은 일찍이 알았지만, 자식이 부모를 낳 -
가을 저녁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11 10:24:46퇴근길 버스정류장 가는 길 뒹구는 후박나무 잎새에 가만히 발 겹쳐보네 구두보다 길고 내 쪽배처럼 생긴 누런 잎 한 발로 딛고 남몰래 휘청거리네그렇지, 물 위에 딛는 첫발은 늘 마음 먼저 출렁이지 그때 이맘때 이른 저녁 먹고 빈방에 불 켜두고 만삭인 아내 쪽배에 태워 노을 속으로 힘껏 저어 가 잠시 밝은 호수 가운데 두런두런 하노라면 물결이 쪽배를 오두막 가까이 되돌려주었지그 쪽배 지금 호수 바닥에서 혼자 서늘하겠 -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10.04 10:36:50어느 해 봄 그것도 단 한 번 신을 짝짝이로 신고 외출을 한 다음부터 나는 갑자기 늙기 시작했다아무에게도 말하진 않았지만 햇살 좋던 봄날 아침의 아무것도 아닌 실수였는데 그 일로 식구들은 나의 어딘가에서 나사가 하나 빠져나갔다고 보는 것 같았다그게 아니라고 그렇지 않다고 장에 나가는 염소처럼 뻗디디며 한동안 혼자 뿔질을 해대던 나는어느 날 마당에 나뭇짐을 벗어놓듯 먼 데 어머니 심부름을 갔다 오듯 그 속으로 -
코스모스
오피니언 사외칼럼 2016.09.27 10:39:00코스모스가 살아온 방식은 한결같이 흔들렸다는 거다 이 바람결에 쏠리고 저 노을 쪽으로 기울며 제 반경을 끊임없이 넘어가던 그 범람이 코스모스의 모습 아니던가 가만히 서 있을 땐 속으로 흔들리는 꽃 몸이 그토록 가늘고 긴 것은 춤을 추라고 생겨난 것이다 가늘고 길수록 춤은 위태하니 위태해야 더욱 춤인 것을어머니께서 나를 지으실 때 꽃대 무너진 아득한 어둠 속에서 그 꽃잎 한 움큼 뜯어 삼켰던 것일까 내 몸의 성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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